[필진 칼럼] 끊이지 않는 총기 난사와 미국 사회의 ‘제자리걸음’
2022년 8월 2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이어서 총기 규제를 좀처럼 진전시키지 못하는 미국 사회의 문제를 진단한 글을 한 편 더 썼습니다.

 

이틀 전에 소개한 샌디훅 이후 10년에 관한 글의 제목은 “무엇이 달라졌나?”가 아니라, “달라진 게 없다”고 단정적으로 썼어도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학교에서는 수백 건의 총기 사고가 났고, 총기 난사로 분류할 수 있는 사건으로 좁혀도 수십 건이 일어났습니다. 학교 밖으로 범위를 넓히면 훨씬 더 참담합니다. 지난 주말은 미국의 현충일 연휴였는데, 연휴 사흘간 최소 12건의 총기 난사가 일어났습니다.

학교에서 어린이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던 노인이, 식당에서 밥을 먹던 가족이 전쟁에서나 쓰이는 자동소총에 맞아 스러지는 일이 하루가 멀다고 계속 일어나지만, 그때마다 반짝 인 분노는 이내 무기력으로 귀결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심지어 총기에 대한 인식부터 완전히 반대이다 보니, 총기 규제 논의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은 어떤 글을 소개할까 특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NPR에서 지난해 말 입수해 단독 보도한 1999년의 한 전화 회의 녹취록에 관한 팟캐스트를 들었습니다. 회의는 지난 20여 년간 총기 난사 사건이 날 때마다 수정헌법 2조를 내세우며 총기 규제를 막으려는 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대응의 발원지나 다름없습니다.

사진=워싱턴포스트 영상 갈무리

 

장면 1. 1999년 4월 NRA 수뇌부 회의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12학년 학생 두 명이 총기를 난사해 동료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합니다.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은 학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개인의 총기 소유를 옹호하는 단체 전미총기협회(NRA, National Rifle Association)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열흘 뒤 콜로라도주의 주도 덴버에서는 전미총기협회 연례 총회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협회 수뇌부는 전화로 긴급회의를 진행합니다. 회의 내용은 20년 넘게 알려지지 않았다가 NPR 탐사보도팀이 입수해 보도하면서 공개됐습니다.

전미총기협회 연례 총회는 미국의 수많은 총기 단체와 총기 애호가들, 무기상, 수정헌법 2조를 위하는 단체들이 모이는 행사입니다. 수뇌부는 총회를 예정대로 강행할지, 전면 취소할지, 아니면 가운데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야 할지를 두고 두 시간 넘게 전화 회의를 합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당혹감, 걱정, 두려운 마음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목소리에 묻어납니다.

난상토론이 이어집니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여론의 뭇매를 맞을까 봐 걱정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희생자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협회가 기금에 돈을 대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당시 NRA는 분명 여론의 눈치를 보는 단체였습니다. 지금처럼 막강한 위상을 지닌 단체가 아니었죠. 물론 실제로 희생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슬픔에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려 신경을 썼다는 점은 인상적입니다.

결국, 전미총기협회는 연례 총회를 예정대로 진행하되, 수많은 사람이 모여 최신형 총기를 사고파는 왁자지껄한 행사는 자제하고, 무엇보다 언론에 협회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기로 합니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되, 이번 사건의 원인을 총기로 국한하는 것은 대단히 편협한 시각임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총기를 소유한 미국인 절대다수는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이다, 문제는 폭력적인 사상과 문화에 물든 극소수의 나쁜 사람과 이를 행동으로 옮긴 범인이지 총기 자체는 죄가 없다.

당시 인기를 끌던 마릴린 맨슨의 헤비메탈 음악이나 비디오 게임, 영화 매트릭스의 폭력성 등 총기에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만한 소재라면 어김없이 NRA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런 논리는 이후 학교를 비롯한 곳곳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NRA가 발표하는 성명서의 뼈대가 됩니다.

마이클 무어는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미국 사회의 총기 문제를 조망한 다큐멘터리 볼링 포 컬럼바인을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로 2003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분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죠. 20년 전 영상이라 화면 비율도, 등장인물의 복장도 옛날 영상 티가 나지만, 내용만 보면 지금 찍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미국 사회의 총기 문화는 그대로입니다. NRA 수뇌부가 당시 회의에서 정한 대응 방침은 지난 20여 년간 일종의 매뉴얼로 굳어졌습니다.

 

장면 2: 지지 정당에 따른 총기 여론 양극화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이 났을 때만 해도 미국에서 지지 정당은 집에 총이 있는지, 총기 규제를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예측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지표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총기 여론에서도 지지 정당에 따라 달라지는 양극화가 발견됐습니다.

지지 정당에 따른 총기 소유 여부의 차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벌어졌습니다. 그래프=팻 이건 NYU 정치학과 교수

양극화의 원인을 하나로 꼽기는 어렵습니다.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을 거치며 총기 규제가 완화됐고, 인과관계를 밝히긴 어렵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뒤 공화당원들이 총기를 더 많이 샀고, 총기 옹호 여론이 높아진 점은 눈에 띕니다.

 

장면 3: 유발디 총기 난사 이튿날, 의회 복도

현재 하원을 통과한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이 상원에 계류 중인데,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를 비롯한 공화당 상원은 이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교착 상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고, 그러려면 질문을 똑바로 던져야 합니다. 유발디의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NPR 켈시 스넬 기자가 의사당을 지나는 의원들에게 총기 규제에 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스넬 기자는 복도를 지나던 마이크 라운즈(공화, 사우스다코타) 상원의원에게 물었습니다.

“미국 시민들에게 의회가 우리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나요? 도대체 의회는 뭘 하고 있는 거죠?”

라운즈 의원은 논점에서 엇나간 답을 내놓습니다.

“의회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죠. 의회도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고요. 법을 제정하는 게 의회가 하는 일이지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안 나오게 하는 일까지 의회의 몫은 아니잖아요.”

총기를 소유한 미국인 대다수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NRA의 논리는 공화당 의원들의 입을 통해서도 수없이 되풀이됩니다. 하지만 지금 하원을 통과하고 상원에 기약 없이 계류 중인 법안에는 선량한 시민들이 가진 총기를 빼앗는 내용이 없습니다. 법안의 골자는 총기를 사려는 사람들의 신원 조회를 좀 더 강화하고, 자동소총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제한하고, 한꺼번에 수십, 수백 발을 장전할 수 있는 탄창을 제한하는 겁니다.

미국인이 아니면 저렇게 상식적인 규제조차 세울 수 없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지금 글을 쓰는 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느냐부터 합의는커녕 접점도 찾기 어려울 만큼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에 서 있습니다.

 

장면 4: NRA 연례 총회와 트럼프

NRA는 자금력만 놓고 보면 강력한 로비 단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몇 년 전에는 직원들 월급을 못 줄 만큼 자금 사정이 나빠지기도 했죠. 그러나 로비 단체의 영향력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민주당, 공화당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NRA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협회가 수정헌법 2조와 총기 소유 권리를 매우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회원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 사회에서 열리는 타운홀 미팅에 나타나 반대 집회를 열거나 선거 사무소에 전화, 우편, 이메일로 끊임없이 낙선 운동을 벌이고 청원을 넣는 일의 타깃이 되는 건 모든 정치인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장면 1에서 소개한 1999년 전미총기협회 수뇌부 전화 회의 내용 가운데 또 인상적인 장면은 공화당이 전미총기협회에 총기 규제 여론에 대응할 논리를 정립해달라고 은밀하게 부탁한 부분입니다. 소속 정치인들이 지역사회를 찾아 시민들을 만날 때 치안을 위해 총기 규제를 강화해달라는 요구를 받게 될 텐데, 이때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지 모범 답안을 만들어달라고 한 셈입니다. 실제로 로비 단체들은 정치인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곤 하는데, 이때 정립한 NRA의 논리는 지난 20여 년간 굳건히 이어져 왔습니다.

텍사스주 유발디의 한 초등학교에서 21명이 총기에 목숨을 잃은 지 얼마 안 돼 휴스턴에서 열린 NRA 연례 총회에 참석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도 핵심은 그대로였습니다. 총기를 보유한 대다수 미국인은 선량한 시민이며, 총기가 문제가 아니라 나쁜 사람이, 폭력적인 문화가 문제라는 논리 말입니다.

NRA의 영향력은 조직의 자금력과 무관하게 여전히 막강합니다. 심지어 이제는 일종의 관성이 생겨서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외치는 미국 언론조차 실제로 규제를 강화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총기 규제에 관한 한 미국 사회는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계속할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그나마 있는 규제마저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막기도 벅차 보일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