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신냉전과 ‘인피니티 스톤’ 반도체
2022년 7월 28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바야흐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이어져 온 세계화를 통한 글로벌 분업 체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존 체제에서는 호주, 러시아, 중남미, 중동 등지의 자원을 활용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의 인력과 제조 기술로 제품을 만들고, 미국, 유럽, 아시아 등이 이를 소비했습니다. 세계의 공장 중국과 최대 시장 미국이 큰 축을 이루는 시스템이었죠.

이런 글로벌 분업 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블록화 또는 각개 약진하는 새로운 흐름이 잇따라 나타나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와 식량 가격의 급격한 인상, 중국의 제로 코비드 정책에 따른 공급망 혼란, 미국과 유럽의 정치 양극화 등은 기존 체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앞으로 지정학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간 신냉전의 서막으로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애쉬센터(Ash Center) 셜리 유(Shirley Yu) 연구원은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경쟁의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유 연구원은 신냉전 시대의 경쟁이 가져올 기술과 혁신 기반 경제 성장에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20세기 냉전 시기와 비교해 봅시다. 냉전 시기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극한 대립 속에 불꽃 튀는 기술 경쟁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치열한 경쟁은 우주, 군사, 통신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현재 우리 사회의 혁신을 이끄는 인터넷과 정보화 시대는 이런 흐름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인간을 달로 보냈던 문샷(moonshot) 프로젝트도 따지고 보면 냉전 시대 경쟁의 산물이었습니다.

최근 나타난 긴장 관계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 사이의 경쟁이 기술 진보로 이어질지, 공급망 단절에 따른 비효율을 일으킬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양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인 미국과 중국은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도심형 항공기, 재생에너지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재생에너지와 인공지능을 비롯한 몇몇 분야에서는 중국이 미국보다 앞서거나 미국과 비슷한 수준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두 분야에서는 미국을 포함한 민주 진영의 우세가 확고합니다. 금융 시스템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21세기의 ‘인피니티 스톤’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반도체 기술입니다.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와 금융 규제를 바탕으로 침략국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휴지통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은행에 돈이 있어도 쓸 수 없게 됐죠. 중국은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디지털화폐가 미국 달러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융 시스템과 글로벌 결제 체제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중국은 금융시장을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하지만, 현재 중국의 권위주의 시스템은 개혁의 선결 요건인 변동 환율제와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반도체 설계 기술 분야에서도 미국의 역량은 절대적입니다. 앞으로 기술 경쟁에서 첨단 반도체의 중요성은 절대적입니다. 고성능 반도체가 없으면 첨단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 드론과 잠수함의 운행 시스템은 무용지물입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팀아메리카가 훨씬 앞서 있습니다. 10나노 이하의 초미세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은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뿐입니다. 짧은 기간 내에 두 기업을 추격할 만한 기업도 미국의 인텔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기술은 6세대나 뒤처진 28나노 수준이며, 이마저도 미국의 기술 수출 규제로 성장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공동 개발, 대만과 일본의 기술 협력과 TSMC의 일본 공장 신설, 정부 간 협력과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확정한 미국과 한국 간 반도체 기술 연합 등 팀아메리카 진영의 반도체 협력의 고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로 나타난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연합 안에서 끊긴 고리입니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첨단 반도체 생산 기지가 미국에서 너무 먼 동아시아에 집중해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코앞이죠. 반도체 생산 기지인 대만과 한국은 물론, 소재, 부품, 장비 강국인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예견해 화제가 됐던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이 떠오릅니다. 자이한은 앞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에서 미국이 더는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데 돈과 노력을 쏟아붓지 않으리라 내다봤습니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면서 이념이 다른 진영끼리 벌이던 지정학적 경쟁이 사라졌습니다. 자이한은 또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이 미국 에너지 자립화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셰일가스를 캘 수 있게 되면서 풍부한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게 된 미국은 에너지를 수입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중동과 유럽, 아시아의 질서를 지키고, 세계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돈과 인력과 노력을 투입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사라진 것이죠. 글로벌 분업의 효율성을 일부 포기한다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손을 떼고, 캐나다의 자원과 중남미의 노동력만 활용해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도 독립된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시장이면서도 기술, 고급 인력, 자본, 식량 등 핵심 생산 요소 분야에서 세계 1위의 경쟁력을 가진 축복받은 국가입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장벽 뒤에서 아메리카 대륙만으로 충분히 안전하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이한의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중심주의는 포퓰리즘에 빠진 리얼리티쇼 스타가 벌이는 무질서와 혼란의 좌충우돌이 아니라, 사업가의 관점에서 정한 미국의 이해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입니다. 이 책은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인 2016년 초에 나왔는데, 트럼프 행정부는 자이한이 예견한 대로 미국이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는 대가로 치르던 비용을 대기를 무척 꺼렸습니다.

21세기의 인피니티 스톤. 사진 = 마블 홈페이지

다만, 자이한이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습니다. 바로 21세기의 ‘인피니티 스톤’인 반도체입니다. 재생에너지가 늘어나 에너지 분야의 전기화가 확산하고,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제품이 전자제품이 되리라 전망됩니다. 이에 더해 AI와 데이터의 활용이 늘어난다면 첨단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집니다. 전력을 변환하고, 전자제품을 제어하고, 데이터를 기록하고, 추론하기 위한 필수적인 부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글로벌 경제와 산업을 선도하는 근간이 되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은 모두 TSMC와 삼성전자에서 생산한 반도체에 의존합니다. 전기차 전쟁의 최전선인 테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대만의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자 곧바로 자동차 공장이 멈춰서는 걸 목도했습니다. 미국은 고부가가치인 설계 분야에서는 엔비디아나 퀄컴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보유했지만, 실제로 반도체를 찍어내는 공장은 80% 이상이 동아시아에 모여 있습니다. 미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설계와 핵심 기술 분야를 맡고, 설계보다는 부가가치가 낮으면서 대규모 자본과 공정이 필요한 반도체 제조 분야는 동아시아에 하청을 맡긴 구조입니다. 빅테크와 반도체 설계 기업이 반도체의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동아시아 기업들이 없으면 반도체를 생산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미국과 서유럽의 기업이 석유 시추 기술을 가지고 중동, 중남미의 유전에서 석유를 시추해 많은 부가가치를 가져가는 시스템과 비슷합니다. 팀아메리카와 권위주의 진영 간 치열한 경쟁과 공급망, 시장의 분리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유일한 반도체 공장이 중국의 앞마당이죠. 미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전 세계 GDP에서 민주주의 국가들의 GDP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이 1980년보다 낮았습니다. 도표 출처=블룸버그 기사

미국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첨단 반도체 제조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의 반도체 산업 정책이 돌아왔다는 내용의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반도체 제조 공장에 520억 달러(61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안건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유럽연합도 보조금과 인프라 지원으로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려 합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작년과 올해 삼성전자와 TSMC는 미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 건설을 발표했고, TSMC는 일본과 유럽에도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려 합니다.

지난주 캡틴 아메리카인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처음 찾은 곳은 미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이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정책을 비효율의 전형이라 비판해 온 서구에서 손때 묻은 산업정책을 다시 꺼내든 것은 반도체가 신냉전의 핵심인 인피니티 스톤이기 때문입니다. 그간 초미세 제조 공정의 경쟁력을 잃고 TSMC에 제조를 맡겼던 인텔은 반도체 제조 경쟁에 뛰어들겠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1위의 반도체 설계 회사 엔비디아도 이런 인텔의 계획에 협력 의사를 밝혔습니다. 팀아메리카 정부와 기업들은 인피니티 스톤을 손에 넣고자 반도체 연맹을 본격적으로 꾸리기로 한 모양새입니다.

반도체 웨이퍼를 꺼내든 캡틴 아메리카. 사진 = 월스트리트저널/패트릭세만스키(Patrick Semansky)

그렇다면 한국은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중국을 버리고 민주 진영의 대부인 미국의 손을 꼭 잡고 가야 할까요? 우리의 기본 원칙을 고려하면 당연한 답입니다. 신냉전 흐름이 강해질수록 미국과 동맹의 틀을 벗어나서는 홀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중국이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 시장이라도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 첨단 반도체 공장을 죄다 미국에 지을 수는 없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중요한 전략적 가치는 반도체 제조 공장에서 나옵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이나 한국과 갈등을 빚고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진다면 미국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미국이 자국에 반도체 제조시설을 갖추고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자이한의 의견처럼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는 미국은 자국민들의 생사를 걸면서까지 직접 개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우크라이나를 위한 무기, 경제 원조에 그쳤을 뿐 직접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곳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바로 대만입니다. 중국과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50% 이상을 생산하는 최대의 공장입니다. 대만의 TSMC가 미국에 제조 공장을 짓더라도 최첨단 반도체를 미국이 스스로 생산할 만큼 대규모로 공장을 짓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만도 스스로 핵심적인 전략적 가치를 잃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미국 편을 들다가 중국이라는 큰 시장을 잃게 되면 그 타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은 우리 기업과 비슷하게 미국 기업은 물론 중국 기업과도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과 관계가 단절될 경우 피해는 우리나라보다 대만이 더 심각할지도 모릅니다. TSMC도 중국에서 중급 수준의 제조 공장을 가동하고 있고, 대만 1위이자, 세계 5위의 반도체 설계 기업인 미디어텍은 중국 휴대폰, 가전 업체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성장했습니다. 또 반도체를 제외하더라도 스마트폰, 자동차, 조선, 철강, 미디어 등 다른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만의 산업은 반도체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도체 경쟁에서 밀리면 자국 산업과 경제가 급속히 붕괴할 우려가 있죠.

물론 우리나라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지금처럼 대만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한 대만과 공동 전선을 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시장과 미국이라는 동맹 사이에서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암묵적으로 서로 비슷한 전략을 택하거나 최소한 상대방의 대응을 참고해야 하는 국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필요하다면 반도체 테스트와 조립 공정에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과 미국 한쪽 편을 들기 어려운 동남아시아 국가와 함께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미국 편에 서되, 지나치게 중국을 자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고육지책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TSMC의 창업주이자 대만 반도체 산업의 대부인 모리스 창(Morris Chang)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인프라, 인력에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입니다. 높은 경제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TSMC는 주요 고객사인 미국 빅테크와 미국 정부의 정치적인 요구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모리스 창 회장이 경제적인 이유를 몰라서 굳이 언급한 것일까요? 그는 미국에 반도체 제조공장을 짓는 것이 비용도 비용이지만, 궁극적으로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낮추는 악수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입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결코 직접 군대를 보내면서까지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직접 개입해 얻을 만한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화당인 트럼프 행정부나 민주당인 바이든 행정부가 똑같이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약속하고 이행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트럼프 정부의 자국 중심주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새로운 세계질서는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인피니티 스톤인 반도체 공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인피니티 스톤은 전략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각자도생의 신냉전 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돌다리를 두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