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우크라이나 밴드 ‘칼루쉬 오케스트라’, 유로비전 2022 우승
2022년 7월 22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올해는 유럽연합(EU)을 창설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체결된 지 30주년입니다.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단일 화폐 유로화를 쓰고, 솅겐 협약에 가입한 국가들 사이에선 국경의 개념도 희미해졌으며, 대부분 나토(NATO) 회원국인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일제히 규탄하며 연대를 다지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의 면면을 살펴보면 비슷하면서도 서로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많은 나라가 매년 함께 치르는, 진정 유럽의 행사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행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유럽 최대 가요제인 유로비전(Eurovision)입니다.

유럽 친구들에게 유로비전에 관해 물어보면 나라를 불문하고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오히려 한국에선 유로비전이 많이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로비전을 모른다고 하면 진심으로 놀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친구들도 꽤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전설 아바(ABBA)를 배출한 무대이자, 지금은 2억 명 가까운 사람이 시청하는 대회를 들어보지도 못했다니, 그럴 만도 합니다.

지난 주말 올해 유로비전 대회가 열렸고, 우크라이나 밴드 칼루쉬 오케스트라(Kalush Orchestra)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먼저 지금 유럽에서,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노래 중 하나일 칼루쉬 오케스트라의 노래 ‘스테파니아’부터 듣고 가시죠.

오늘은 저처럼 유로비전에 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제가 찾아본 유로비전 가이드를 요점만 추려 소개합니다.

유로비전은 1956년, 유럽 각국 공영방송사들이 자국 출신 가수들의 노래를 앞세워 펼친 친선 경연에서 시작됐습니다. 이제 유로비전은 결승 경연 시청자가 2억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음악 축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실 축구 같은 스포츠면 몰라도 노래는 국가대표를 선발해 경쟁을 펼친다는 게 다소 낯선 장르이긴 하죠. 어쩌면 유럽은 유로비전 같은 행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륙일지도 모릅니다. 올해도 주최국 이탈리아를 포함한 36개국의 뮤지션들이 모여 경연을 펼쳤고, 14일 결승 무대에는 25개 팀이 올랐습니다.

 

경연 방식

국가를 대표할 가수를 뽑는 기준과 방식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방송사에서 기준을 정해 뽑기도 하고, 스웨덴처럼 아예 국가대표 선발전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방영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다만 경연에 참가하는 곡의 길이는 3분을 넘지 말아야 하고, 노랫말이나 퍼포먼스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승 무대에 오르는 25개 밴드 가운데 5개 팀은 정해져 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같기도 하고, 그게 다소 무거운 비유라면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에 매번 본선 참가가 보장된 핵심 참가국에 빗댈 수도 있겠습니다. 그 다섯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인데 단지 나라가 커서 그런 건 아니고, 유로비전 주최 측에 가장 많은 돈을 후원하는 나라라서 그렇습니다. 결승 무대까지만 보장됐을 뿐 결승에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건 이 나라 출신 밴드, 가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가팀의 무대가 하나씩 펼쳐지다 보면 누가 우승할지에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죠. 각국 심사위원의 점수를 먼저 발표하고, 심사위원 점수가 낮은 팀부터 시청자 투표를 집계한 최종 점수를 공개합니다. 시청자들의 팬 투표가 결과를 정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심사위원 투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올해도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해 나선 칼루쉬 오케스트라가 시청자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고,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주최국, 2022년이라 달라진 점

결승 무대는 지난해 우승팀을 배출한 나라에서 펼쳐집니다. 지난해 이탈리아 밴드 마네스킨(Måneskin)이 우승을 차지하며 이탈리아가 자동으로 2022 유로비전 개최권을 따냈고, 토리노에 있는 팔라올림피코(PalaOlimpico)가 결승 무대의 공연장으로 낙점됐습니다.

앞서 노랫말이나 퍼포먼스가 너무 정치적일 경우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올해는 많은 것이 예외를 인정받았습니다. 다들 예상하시겠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때문입니다. 우선 유로비전 측은 러시아를 참가국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푸틴이 한창 침공을 준비할 때만 해도 정치적 중립을 운운하며 러시아 밴드의 대회 참가를 막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전쟁을 일으킨 바로 다음 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각국 뮤지션들의 격렬한 항의에 곧바로 방침을 바꿔 “러시아의 참가를 받아들이는 건 유로비전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칼루쉬 오케스트라 공연 모습

칼루쉬 오케스트라는 결승 공연이 끝난 뒤 영어로 마리우폴에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을 위해 지금 당장 모두 행동에 나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경연에 참가하기 위해 전쟁 중에 특별 여권을 발급받고 이탈리아로 온 밴드는 앞서 열린 반전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정치적인 의사 표시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유럽인들의 연대는 예상대로 시청자 투표에서도 나타났고, 칼루쉬 오케스트라는 심사위원 점수를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칼루쉬 오케스트라의 우승으로 우크라이나는 2023 유로비전 개최권을 얻게 됐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칼루쉬 오케스트라의 우승을 축하하며 내년 유로비전을 마리우폴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유로비전 우승팀을 배출한 나라에서 이듬해 대회를 열지 못하거나, 열지 않겠다고 할 경우엔 대체 개최국을 선정합니다. 이스라엘은 1978, 79년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는데, 1980년 대회는 개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로비전 측은 네덜란드 헤이그를 대체 개최지로 정해 경연을 치렀습니다.

유로비전에 유럽 국가가 아닌 이스라엘이 참가하고 있다는 점을 보고 의아해하시는 분 계실 겁니다. 1973년부터 유로비전에 참가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이어 2015년부터는 호주도 유로비전에 매년 참가하고 있습니다. 호주가 우승을 차지해 유로비전이 호주에서 열리게 되면 유럽 각국 가수들이 호주로 공연하러 가는 일부터 유럽과 호주의 시차 탓에 방송 시간에 이르기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다행히(?) 아직 호주는 우승팀을 배출한 적이 없는데, 유로비전을 주최하는 유럽방송연합은 호주가 우승할 경우 유럽에서 호주와 공동 개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