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푸틴의 철 지난 프로파간다 “재난 배우”
2022년 6월 20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21세기 전장은 인터넷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유언비어 살포와 같은 기존의 심리 전술은 인터넷 가짜뉴스라는 이름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습니다.

전술은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로파간다를 위해 특정한 이야기를 골라 가짜뉴스 딱지를 붙이는 데 이르렀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민간 시설을 공격하는 등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러시아가 이른바 ‘가짜뉴스 맞불’을 놓으며 반박하는 식입니다.

이달 초, 주영국 러시아 대사관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임산부 피해자 사진이 가짜뉴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전하는 사진과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재난 배우(crisis actor)”라는 음모론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재난 배우란 원래 긴급 구조원의 훈련에 부상자 역할로 투입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음모론자들 사이에서 특정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돈을 받고 참여하는 인물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된 단어입니다.

CNN은 지난 10일자 기사를 통해 세상을 속이려는 이들이 어떻게 음모론을 만들어내는지 소개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연출된 장면, 그러니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영화나 드라마 장면을 일부러 찾아낸 다음 이것이 누군가가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를 부풀리기 위해 만들어낸 영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류 언론”이 이런 장면을 현재 우크라이나 상황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거짓 주장도 덧붙입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뉴스”를 만들어내서 유포하는 전략이죠.

사진=CNN 영상 갈무리

CNN은 팩트체크를 통해 비엔나에서 열린 기후변화 행동 촉구 시위 장면, 저예산 SF 영화의 장면 등이 “가짜뉴스”로 포장돼 퍼지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실제로는 그 어떤 주류 언론도 이들 장면을 우크라이나 전쟁 장면으로 보도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했죠.

로이터 통신도 비슷한 내용의 팩트체크 기사를 실었습니다. 요컨대, 바이럴을 탄 가짜뉴스 영상은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꾸며내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낸 영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류 언론이 러시아를 매도하는 거짓 보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누군가가 퍼뜨린, 현재의 전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영상이라는 것입니다.

“재난 배우”를 들먹이는 음모론은 푸틴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2012년 12월,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당시에도 이 사건이 총기 규제 여론을 확산하기 위한 정부의 조작이며, 사망한 초등학생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슬픔에 빠진 부모들 또한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라는 음모론이 대대적으로 퍼진 바 있습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며, 아이들의 시신을 다시 파내어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뉴욕타임스의 엘리자베스 윌리엄슨 기자는 최근 “샌디훅: 미국의 비극과 진실을 찾는 전쟁(Sandy Hook: An American Tragedy and the Battle for Truth)”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샌디훅 참사를 사회 주변부에 머무르던 음모론자들의 커뮤니티가 본격적으로 “음모론 산업”으로 부상한 계기로 보고 있습니다. 윌리엄스는 책을 통해 “인포워즈(Infowars)”라는 대표적 음모론 사이트를 만든 알렉스 존스 같은 인물이 주류로 부상한 과정과, 음모론이 미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편, 2018년 2월의 뉴욕타임스 기사 생존자나 피해자를 재난 배우로 매도하는 음모론자들이 인터넷 시대에 더 큰 힘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술 자체는 남북전쟁 때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했습니다. 1871년의 보도에 따르면, 한 정치인은 “KKK단의 폭력 피해자 중 다수가 실은 거짓 진술을 하도록 훈련받고 일당 2달러를 받은 사람들로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민권 운동 시대에도 재난 배우 타령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폄하하고 매도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됐습니다. 1957년 백인들만 다니던 공립학교에 입학해 등교 투쟁을 이어갔던 흑인 학생들, 이른바 “리틀록 9인” 역시 돈을 받고 활동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정한 의도를 가진 외부 세력이 배후에 있다거나 활동가들이 금전적인 보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하려는 시도는 민권 운동 시대 내내 이어졌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963년 “버밍햄으로부터의 편지”에도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