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전쟁범죄 규정과 딜레마
2022년 6월 15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세계 각국의 규탄과 제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러시아의 침공 행위가 인도주의 관련 국제협약과 관습법을 위반한 ‘전쟁범죄’에 해당하는지의 여부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BBC 코리아도 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3월 8일자 팟캐스트를 통해 민간인 피해와 집속탄 사용 등을 근거로 전쟁범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 또 우크라이나 당국이 직접 피해 현장에 조사 및 촬영팀을 파견해 증거를 수집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러시아의 고위급 책임자들을 기소하고 처벌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된 의견입니다. 우선 가해국인 러시아는 전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용의자가 러시아 국경을 벗어나 체포되거나 자수하지 않는 한 처벌이 어렵고, 국가 간 분쟁에 국가 단위의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는 이미 소송이 시작됐지만, 패소 판결이 나더라도 판결 집행을 맡고 있는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가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Unsplash

전쟁은 다 나쁜 것인데 ‘범죄’에 해당하는 전쟁을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있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전쟁이 불법이라는 국제 규범이 생겨난 것은 인류사 전체를 놓고 보면 매우 최근에 생긴 일입니다. 세계 각국이 국제 협약을 통해 전쟁을 불법화하고 평화 체제를 수립하고자 노력하게 된 것은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실감한 이후였죠.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 규약, 켈로그-브리앙 조약 등으로 대표되는 전후 평화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유토피아적 공상, 탁상공론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지금 러시아가 전 세계적인 규탄의 대상이 된 것 자체가 이들 조약의 유산입니다.

복스의 3월 6일자 기사는 타니샤 파잘과 우나 해서웨이/스캇 샤피로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전쟁이 범죄가 된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전쟁으로 한 나라가 끝장나는 “폭력적인 국가의 사망”은 과거 매우 흔한 일이었고, 20세기 이전에는 영토 정복이 국가의 권리로 여겨질 만큼 전쟁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1945년 이후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사망”이 급격히 줄어든 데는 핵무기의 등장이나 열강 간 핵 억지력 같은 요인도 작용했지만,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 규범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기사는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 국제 체제에서 침략을 자행한 국가에 행해지는 경제 제재 역시 한 국가의 경제를 완전히 파탄 내고 국민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는 조치로서, 국가의 행위에 대해 민간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위배한다는 점에서 군사적 제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리가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사실은 전쟁을 범죄로 인식하는 국제 규범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규범을 어기는 국가를 어떻게 규제하고 처벌할 것인가가 여전히 현실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라는 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