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달리 뭐라고 부르나?”
2022년 6월 8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쓴 전쟁 관련 세 번째 글입니다. 3월 3일에 올렸던 글입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해 온” 언론인 두 명이 받았습니다. 한 명은 필리핀계 미국인 마리아 레사(Maria Ressa)였고, 다른 한 명은 러시아에 남은 몇 안 되는 독립언론 노바야 가제타(Novaya gazeta)의 드미트리 무라토프(Dmitry Muratov) 편집장이었습니다. 노벨상 위원회는 수상자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상이 그 어느 때보다 위협받는 세상에서 용기 있는 언론인들은 소중한 가치를 위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노바야 가제타는 1993년에 창간한 독립언론사입니다.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인 무라토프는 24년째 편집장을 맡아왔습니다.

드미트리 무라토프 편집장. 사진=노벨상 위원회

노바야 가제타는 권위주의 러시아 정부의 검열과 위협에 맞서 언론의 본령에 충실한 기사를 굳세게 써왔습니다. 정권의 부패, 시민을 향한 경찰의 폭력, 불법 체포와 인권 침해, 부정선거 등 푸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끈질기게 발굴, 취재해서 보도했죠. 그 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 무려 여섯 명의 기자가 암살됐습니다.

무라토프는 노벨평화상 수상이 확정된 뒤 상을 노바야 가제타 소속으로 일하다 숨진 기자들에게 바친다며, 특히 안나 폴리츠코프스카야(Anna Politkovskaya)를 언급했습니다.

이 상은 원래 저 말고 다른 이들이 받아야 할 상입니다. 바로 어제가 안나 폴리츠코프스카야가 살해된 지 15년 되는 날이었죠. 노벨상은 세상을 떠난 고인에게는 주지 않는 원칙이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나를 비롯해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수많은 언론인, 또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있는 기자들이 받아 마땅한 상을 그저 제가 대리로 받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폴리츠코프스카야 기자는 오랫동안 체첸 공화국에서 자행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와 러시아 정부 고위 관료의 부패를 고발, 보도한 기자였습니다. 2006년에 자신이 살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잔혹하게 살해됐는데, 청부 살인으로 보이는 범죄의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무라토프는 푸틴 대통령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껏 살해 위협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라토프는 늘 “내가 편집장으로 있는 한 노바야 가제타의 편집권 독립은 지켜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국경 지역 러시아인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한 보도 준칙을 러시아 언론사에 배포했습니다. 노바야 가제타는 이번에도 푸틴이 언론사의 입에 물리려는 재갈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무라토프 편집장을 뉴요커가 인터뷰했습니다.

 

Q.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부 측의 검열이 더 거세졌나?

A. 몇 시간 전에 노바야 가제타 기자들이 모여 편집회의를 했다. 모든 기자, 직원들은 푸틴이 기어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철저히 파괴해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대로 두면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다. 노바야 가제타는 단호히 이 전쟁을 규탄한다. 그와 별개로 편집국을 향한 검열, 압박의 수위는 곧바로 높아졌다. 정부는 “전쟁(war)”, “점령(occupation)”, “침략(invasion)”과 같은 단어를 기사에 쓰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다. 노바야 가제타는 전쟁을 전쟁이라고 쓸 것이다.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겠지만, 몇몇 직원이 창고에서 지난 몇 년간 쓴 적 없는 방탄복, 방탄 헬멧을 챙겨서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다.

 

Q.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해방해주러 간다고 표현했다. 정부의 프로파간다가 러시아 국민들한테 통하고 있다고 보나?

A. 라브로프를 비롯해 푸틴을 둘러싼 크렘린 통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는 침략군을 해방군으로 둔갑시키는 크렘린 통치 엘리트들의 터무니없는 상황 인식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Q. 정부의 검열과 통제, 강경 진압에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반전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시위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나? 노바야 가제타 같은 독립언론을 읽는 일부 시민들만 전쟁을 규탄할 뿐 대다수 러시아 국민은 전쟁에 크게 관심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A.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은 더더욱 그렇다. 이미 1/3 이상의 국민이 모든 종류의 군사 행동에 단호히 반대하는 것으로 나왔다. 전쟁 반대 시위 소식은 끊이지 않지만, 전쟁에 찬성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소식 들어본 적 있나? 100만 명 넘는 사람이 Change.org의 전쟁 반대 서명에 이름을 적었다. 작가, 언론인, 과학자들이 전쟁은 부당하다는 성명을 잇따라 냈다. 극심한 탄압에도 러시아에는 여전히 30여 개 독립 언론사들이 남아있다. 이들은 전쟁의 부당함을 부단히 알리고 있다. 이번 만큼은 러시아 사회가 침략에 침묵하고 있다고 말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Q. 푸틴은 러시아 지도부 안에서도 자신의 노선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서방이 제재를 가해도 이를 견뎌낼 수 있을 거로 계산한 것 같은데, 서방이 이번 전쟁을 막으려면 할 수 있는 조치로는 무엇이 있다고 보나?

A. 푸틴은 “서구 사회의 가치”라는 것 자체를 뼛속 깊이 부정하는 사람이다. 서유럽 국가들의 장관이나 총리를 지낸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국영기업 이사 자리에 앉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돈벌이를 위해 이름이 필요해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다.

지금 시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되돌리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푸틴 주변에는 푸틴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한 사람들만 남아있고, 푸틴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푸틴은 세계의 질서, 우크라이나의 지위에 관해 분명한 자기 생각과 목표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강력한 군대의 통수권도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지만, 솔직히 협상에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Q. 속내를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래도 푸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래 취재해 왔으니 좀 그려줄 수 있나?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함락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생포하거나 암살한다면, 푸틴의 다음 목표는 무엇이 되는 건가?

A. 이 또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우크라이나를 갈라놓으려 할 거다. 르비우(Lviv)를 중심으로 한 서부 우크라이나는 따로 떼어내 완충 지대로 두고,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중부 우크라이나에는 친러시아 정권을 세우는 것이 목표일 것 같다. 돈바스를 포함한 동부 지역은 이미 사실상 러시아에 합병한 상태인데, 최근 이 지역 주민 80만 명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했다.

 

Q. 당신은 2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한 푸틴을 20년 넘게 취재하고 비판해왔다. 이번에 전쟁을 시작한 푸틴의 결정은 과거의 푸틴을 고려하면 예견할 수 있던 일인가? 아니면 어느 순간 푸틴의 정책 기조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까? 갈수록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물론이고 전략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이는 전쟁을 푸틴이 왜 일으켰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A. 정확히 푸틴이 어떤 정보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푸틴은 줄기차게 나토의 동진을 곧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말해왔다. 이를 고려하면 일관성 있는 행동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러시아 국민 대부분이 나토를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정권을 신나치 정권으로 규정한 프로파간다는 처음부터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대인 아닌가. 유대인이 나치 정권의 수장이 될 수 있나? 푸틴은 어쩌면 세계 2차 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걸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Q. 노바야 가제타의 이번 전쟁 보도 원칙이나 미래에 관해 말씀해 달라.

A.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노바야 가제타 독자는 약 3천만 명쯤 된다. 지난 며칠 사이 웹사이트를 500만 명이나 다녀갔다. 러시아 정부가 공표한 보도 지침을 따르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 기사를 계속 쓰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정한 보도 원칙을 지키고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우리 특파원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과 편집국 기자들이 검증한 사실만 보도하는 게 절대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원칙이다. 전장이나 국경에, 또는 주요 도시의 반전 시위를 취재하는 기자들의 안전이 늘 걱정된다. 모두가 무사히 취재하고 계속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편집국 모두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노바야 가제타 기자와 직원들은 우리 기사를 읽어주는 독자를 배신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결의했다. 검증된 사실만 쓰며, 절대 프로파간다를 퍼 나르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존중하는 만큼 노바야 가제타를 포함해 모든 언론의 편집권도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Q. 여러 전황이 푸틴이 계획한 것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는데, 이번 전쟁으로 푸틴이 실각할 수도 있다고 보나?

A. 푸틴은 절대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올 사람이 아니다. 이미 지난 2020년 개헌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연임 제한을 없앴다. 푸틴이 영원히 권력의 정점에 있어도 되는지 묻는 투표에 유권자의 77.9%가 찬성했다. 푸틴의 주변에 푸틴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이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러시아 국회의장은 “푸틴이 없으면, 러시아도 없다”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는 생각이 다르겠지만, 푸틴이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