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정책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때
2022년 4월 27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영어 “Unintended Consequences”를 옮기면 “의도치 않은 결과” 정도가 됩니다. 삶에서 일이 의도한 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는 많지만, 특히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타나면 문제가 되곤 합니다. 때로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새로운 정책의 부작용이 너무 커서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정책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정책은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수립했느냐보다 결과로만 평가받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의도치 않은 결과’의 대표적인 사례로 21세기 들어 미국 공중보건의 최대 위기 중 하나로 꼽히는 오피오이드 위기(Opioid crisis)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오피오이드는 잘 알려진 대로 아편 성분이 든 합성 진통·마취제입니다. 그런데 약이 잘 듣는 만큼 중독 효과가 너무 강합니다. 결국, 미국의 수많은 저소득층이 오피오이드에 중독돼 너무 많이 죽는 끔찍한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오피오이드 중독에 의한 사망 또는 자살은 앵거스 디튼 교수가 언급한 ‘절망의 죽음’의 대표적인 유형에 들 정도입니다. 이미 오피오이드는 단순한 위기를 넘어 유행병(epidemic)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피오이드 위기가 생겨난 건 사람의 목숨이나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이윤만 좇은 대형 제약회사와 의료 윤리를 저버린 무도한 의사들 때문으로 보는 게 통념에 가까운 설명입니다. 실제로 환자들이 약물에 중독될 가능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처방을 남발한 것이 큰 문제였고, 그 기저에는 제약회사와 의료 기관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 행위, 이를 똑바로 규제하지 못한 규제 당국의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통념과 조금 다르지만, 통념을 보완할 수 있는 설명도 있습니다. 복스가 정책의 결과를 짚어보는 팟캐스트 임팩트(The Impact)에서 4년 전에 다뤘던 이야기에 여전히 새겨볼 만한 교훈이 있어 정리했습니다.

사이슬리 선더스. 사진=템스 텔레비전 인터뷰 갈무리

사이슬리 선더스(Cicely Saunders). 오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위키피디아에는 영국 간호사(English nurse)라고 나오지만, 복스 팟캐스트에서는 의사(Dr. Saunders)라고 부르는 선더스는 1980년대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오피오이드 성분이 든 진통제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권유한 인물입니다.

선더스의 삶과 주장, 그가 실제로 한 일을 보면 그는 분명 좋은 뜻으로 오피오이드를 처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선더스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데 혁신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으며,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줄여주는 걸 의료의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운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에 맞춰 많은 정책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도로 추진한 정책은 뜻한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오피오이드 위기의 시작이 환자의 고통에 더 집중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먼저 오피오이드의 작동 원리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피오이드와 뇌의 관계는 열쇠와 열쇠 구멍으로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오피오이드라는 열쇠로 뇌의 잠겨있는 문을 열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래서 고통을 잠시 잊거나 진정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 분비됩니다. 열쇠가 여러 개 있으면 더 많은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오랫동안 쓰다 보면 문을 더 여러 개 열어야 화학물질을 충분히 얻게 됩니다. 약물에 중독되는 거죠.

의사들은 오피오이드가 중독이 심한 약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 웬만해선 오피오이드를 처방하지 않으려고 한 것도 바로 중독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선더스였습니다.

의사의 의무 중 하나는 ‘죽음의 고통’을 줄여주는 겁니다. 물론 환자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병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료가 어려운 환자의 경우 남은 삶을 최대한 고통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의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 사이슬리 선더스

선더스의 주장은 영국과 미국 의료진 사이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호스피스(hospice) 병동에 머무는 말기 환자들에겐 중독이 큰 우려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줄여줄 수만 있다면 당장 잘 듣는 약을 처방하자는 주장에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었죠.

말기 환자가 느끼는 고통이 크긴 하지만, 말기 환자만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닙니다.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도 엄연히 고통을 느낍니다. 사실 20세기 미국 의사들은 대체로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인) 고통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줄여주기 위해 필요한 처치를 해야 한다는 의사들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환자에게 얼마나 아팠는지 물어봐 주는 의사가 흔치 않던 시절에 환자들은 ‘내 고통을 알아주는, 마음씨 따뜻한’ 의사들을 더 많이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감 능력 뛰어난 병원들에 환자가 더 몰렸습니다.

존스홉킨스 병원의 신경외과 의사 제임스 캠벨은 환자의 고통을 더 물어보는 의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996년 전미 고통 경감 의학회(American Pain Society) 회장직에 오릅니다. 캠벨은 그해 LA에서 열린 의학회 연례 회의에서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호흡, 체온, 맥박, 혈압과 같은 바이탈 사인(vital sign)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취지의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고통은 전혀 그만큼 중요한 지표로 취급받지 못했는데, 기조연설이 주목받자 전미 고통 경감 의학회는 아예 “고통은 다섯 번째 바이탈 사인”이라는 문구를 상표로 등록하고, 적극적인 캠페인을 벌입니다.

고통을 다섯 번째 바이탈 사인으로 볼 수 있을까요? 사진=Unsplash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90년대 전미 고통 경감 의학회의 큰 후원자는 제약회사였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오피오이드 성분이 든 진통제를 개발하던 회사들은 환자의 고통에 신경 써야 한다는 캠페인에 많은 돈을 댔습니다. 물론 캠벨은 제약회사로부터 받은 돈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게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의사들도 환자들의 고통을 최소한 좀 더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캠벨은 말합니다.

어쨌든 전미 고통 경감 의학회의 캠페인은 효과를 거둡니다. 병원을 찾은 환자들에게 질병이나 상처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정도를 묻는 게 몇 년 뒤엔 의무화되기에 이르렀고, 연방정부 정책까지 바꿨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병원 시스템을 갖춘 곳은 미국 보훈부(Veterans Health Administration)가 운영하는 보훈병원들입니다. 매년 약 1천만 명의 환자들이 보훈병원에서 진료를 받습니다. 1998년 보훈병원은 병원 전체에 앞으로 환자가 방문할 때마다 주관적인 고통의 정도를 묻도록 지침을 내렸습니다. 환자가 아프다고 말하면, 이제 의사는 이에 관해 필요한 처치를 해줘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이제 고통은 열이 너무 높거나 맥박이 정상보다 덜 뛸 때 의사가 필요한 처치를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 위상을 갖췄습니다.

환자의 고통에 더 많이 공감하고 이를 줄여주기 위해 필요한 의학적 처치를 다 하자는 좋은 취지와 의도는 제약회사들이 새로 출시한 오피오이드 진통제와 만나면서 경로를 이탈하고 맙니다. 1990년대에 새로운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출시한 제약회사들은 새 진통제가 기존의 마약과 달리 복용한 즉시 약에 취하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며, 성분이 천천히 몸에 퍼져 진통 효과만 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아직 마리화나를 비롯한 마약이 합법화되기 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약에 취하기 위해 약을 사는 일이 발생해선 안 됐습니다. 제약회사들은 또 새로운 진통제가 오피오이드 성분이 있긴 하지만, 중독 효과도 높지 않아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처방하기 안성맞춤이라고 광고했습니다.

의사들이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캠페인을 이용해 제약회사들은 막대한 부당 이득을 챙겼습니다. 제약회사들의 거짓말, 특히 오피오이드 진통제가 중독 효과가 없다고 자신 있게 한 광고가 먹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실은 이 주장에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었습니다. 제약회사들은 오피오이드 진통제의 중독 효과에 관해 장기간에 걸친 실험은커녕 문헌 비교조차 똑바로 하지 않은 채 생산과 홍보를 밀어붙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의사들은 점점 말기 환자 외에 관절염 같은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도 대량의 오피오이드를 처방해줬습니다. 고통을 줄여주는 게 중요한 목표가 됐는데, 마침 진통 효과가 뛰어나고 중독 걱정은 없(다고 제약회사가 장담하)는 약이 있으니, 이를 처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죠. 의사들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분명 지난 수십 년간 중독 우려가 커 처방하지 않던 약물이 성분도 별로 바뀌지 않았는데 갑자기 중독 효과만 급감했다는 제약회사의 말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쉽게 믿은 것이 잘못이었죠.

엄밀히 그 연원을 찾아가 보면, 뉴잉글랜드 의학저널(NEJM,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1980년대에 연구원 두 명이 쓴 편지 한 통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실험 결과를 정리한 연구 보고서가 아니라 연구원 두 명이 사견을 간략히 담아 학회지에 보낸 편지를 실어준 것으로, 당연히 연구논문이 갖춰야 할 과학적 근거 같은 건 없습니다. 고작 101단어에 불과한 아무 근거도 없는 편지가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600번 이상 연구 논문에 인용됐습니다. 1990년대에 오피오이드를 옹호하는 연구 논문들을 보면, 거의 빠짐없이 이 편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중독 병력이 없는 환자들은 새로운 약물에 중독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특히 편지 마지막에 나오는 저 문구는 제약회사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말이 됐습니다. 100단어 남짓한 편지가 저런 당돌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했을 리 없습니다. (벌써 이 글이 1천 단어가 넘었습니다.) 그러든 말든 제약회사들은 저 말을 대대적으로 인용하며,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아프다고 말하는 모든 환자에게 당장 처방해도 될 것처럼 광고했습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제약회사의 광고는 효과를 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환자들은 병원을 찾아와서 고통이 너무 심하니 잘 듣는 진통제를 달라고 의사들에게 애원했습니다. 일부 의사들은 중독 위험을 경고했지만, 환자들은 쉽게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의사를 찾을 수 있었기에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오피오이드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를 넘어 수많은 만성질환을 앓는 미국인들에게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제약회사들이 중독에 관해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는 건 지금의 오피오이드 위기가 초래한 결과가 말해줍니다.

 

가장 큰 책임은 분명 과학을 무시하고 사실을 날조한 제약회사와 이를 규제하지 못한 규제 당국에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러나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의사들의 좋은 취지가 이 위기의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지금 돌이켜봐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정책을 세우고 시행할 때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결과를 가지고 치열한 토론을 벌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피오이드 진통제면, 당장은 고통이 줄어들고 효과가 나타납니다. 아픈 사람을 돕는 걸 사명으로 삼는 의사들이 느끼는 보람은 분명 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럴수록 의사들은 과학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 약을 처방했을 때 환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엄밀하게 따지는 것, 그 결정을 내릴 때 동원되는 근거는 철저한 과학이 뒷받침하는 근거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