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텍사스 낙태금지법 모방한 캘리포니아 총기규제법
2022년 4월 21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은 우려대로 제정돼 곧바로 발효됐습니다. 이후 텍사스주 여성들은 임신을 중절할 권리를 크게 제한받고 있습니다. 이 법이 미친 부차적인 효과 가운데 하나에 관해 12월 15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을 소개합니다.

 

지난주 미국 대법원은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을 유지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은 계속 진행해도 좋다고 했지만, 시민단체들이 처음부터 문제로 지적한 법의 효력, 집행방식 등에는 일단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현재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 구성을 보면, 보수 성향 대법관이 6명, 진보 성향 대법관이 3명입니다. 평소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여러 차례 피력해온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비롯해 보수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번 결정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의 결정 이후 캘리포니아주 개빈 뉴섬(Gavin Newsom) 주지사가 성명을 냈습니다. 뉴섬 주지사는 대법원의 결정을 규탄하며, 캘리포니아주가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을 모방한 총기규제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무력화하기 위해 일종의 꼼수를 쓴 텍사스 낙태금지법의 전략을 그대로 빌려와 시민 누구나 총기 제조업체와 판매상 등을 고소해 돈을 벌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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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뉴섬 주지사의 성명부터 옮겼습니다.

저는 어제 미국 대법원이 사실상 모든 임신중절 시술을 금지한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을 유지하기로 한 결정을 듣고 격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여성이 안전한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권리를 인정한 대법원의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례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지만, 대법원은 이를 그대로 살려뒀습니다. 이번 결정은 주 정부가 법원의 판례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거나 다름없습니다. 연방법원은 최근 공격용 살상 무기를 스위스 군용 칼과 마찬가지로 자기방어에 쓸 수 있는 호신용 무기라고 결정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정부의 권한을 활용해 법원의 잘못된 해석을 우회할 것입니다. 텍사스주 정부는 주어진 권한을 여성의 결정권을 침해하고 잠재적인 해를 끼치는 데 썼지만,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시민의 목숨을 보호하는 데 이 권한을 쓰겠습니다.

저는 정부 담당 부처에 주 의회, 주 법무부와 협의해 새로운 총기규제법을 제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새 법안에 따라 캘리포니아주 안에서 공격용 무기나 유령총 키트(ghost gun kit) 등 살상 무기를 만들거나 판매하는 이들을 누구나 신고, 고소할 수 있고, 신고자는 최소한 1만 달러의 포상금과 소송 비용을 받게 됩니다. 끔찍한 살상 무기를 캘리포니아 시민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에서 사라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민사 소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거라면, 정부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Unsplash

지난 9월에 소개한 글에 썼듯이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임신 6주 이후의 임신중절을 사실상 전면 금지한 법입니다. 기존의 낙태금지법과 이 법이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낙태를 금지하는 주체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텍사스주 법무부장관, 보건부장관 등 낙태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주체가 법에 적시되지 않았습니다.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을 비롯해 낙태할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시민단체들은 보통 낙태금지법을 제정한 주 정부나 법무부를 고소했습니다. 사안이 대법원까지 가면 로 대 웨이드 판례에 비춰 승소하고, 낙태금지법을 무효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보통법 전통을 따르는 미국에서는 법원의 판례가 사실상 법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낙태금지법은 법 자체가 잘못됐다며 소송을 걸 상대가 없습니다.

대신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임신 6주 이후에 ‘불법으로’ 낙태 시술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모든 이를 발견하면 누구나 고소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개인에게 법을 집행할 권한을 위임한 것이 두 번째 특징인데, 시민들은 낙태 시술에 관여한 클리닉이나 도움을 준 사람을 신고하면 포상금으로 최소 1만 달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소송 비용도 피고가 부담해야 합니다. 임신중절 시술을 한 의사나 클리닉은 물론 임신부를 클리닉까지 태워다 준 우버 기사도 소송당할 수 있게 되면서 텍사스주에서는 임신중절 시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뉴섬 주지사가 밝힌 캘리포니아 총기규제법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신고, 고소를 독려합니다. 공격용 무기나 유령총 키트(ghost gun kit)를 제조, 유통하는 이를 신고하면 최소 1만 달러를 포상금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유령총 키트란 등록되지 않은 총기 제조, 판매업체를 통해 유통되는 총기 제조 키트로 이렇게 만든 총은 일련번호도 없어 추적이 쉽지 않은 불법 총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원조회도 없이 온라인에서 마구 거래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뉴섬 주지사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쓴 트윗에서도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의 전략을 그대로 빌려왔다고 밝혔습니다. 여성의 임신중절을 금지해 산모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텍사스와 달리 캘리포니아는 같은 방법으로 끔찍한 살상 무기를 거리에서 내몰아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겠다고 밝혔죠.

캘리포니아주는 다른 진보 성향 주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공격용 살상 무기(assault weapons)를 금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6월 연방법원의 로버트 베니테즈 판사가 금지 조항을 없앴습니다. 베니테즈 판사는 앞서 2017년에는 총알을 10발 이상 장전할 수 있는 탄창을 금지한 조항을 없앴고, 2019년에는 총기를 살 때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법안을 부결시킨 인물입니다.

베니테즈 판사는 공격용 살상 무기를 금지하는 것도 총기 소지의 자유를 인정한 수정헌법 2조 위반이라면서 AR-15 소총을 직접 언급했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군인들이 쓰는 총인 AR-15 소총이 스위스 군용 칼과 마찬가지로 집이나 재산을 지키는 데 쓸 수 있는 방어용 무기라며, “전투에서도, 집에서도 사용 가능한” 무기로 봐야 한다고 썼죠. 처음에는 특정 소총 모델 이름이던 AR-15는 어느덧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호신용, 가정용 소총을 두루 칭하는 이름이 됐습니다.

새로운 총기규제법이 제정되면 총기규제 반대 단체들이 캘리포니아주 정부를 고소할 수 없게 됩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과 마찬가지로 주 정부가 직접 총기 제조나 판매를 단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대신 금전적 보상을 받으려는 개인들의 동기가 모여 총기 업체들에 큰 부담을 안길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s, 민주당이 우세한 주)인 캘리포니아는 현재 주 의회 상, 하원 모두 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의회 회기가 다시 열리는 내년 1월이 돼야 법을 발의할 수 있겠지만, 법이 발의되면 어렵지 않게 통과, 발효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총기규제 반대 단체들은 텍사스주가 낙태금지법을 제정했을 때 캘리포니아와 같은 진보 성향의 주 의회가 같은 식으로 총기규제에 나설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기존 법을 효과적으로 우회하고 무력화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기존 법에 따라 보장되던 권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뜻인데, 수정헌법 2조가 보장한 총기를 소지할 권리도 표적이 될 수 있다. – 총기정책연합 변호사 에릭 재프

속한 진영에 따라 원하는 규제, 법이 다르겠지만, 낙태를 금지하고 총기를 규제하기 위해 꺼내든 전략이 기존의 판례를 우회하고 무력화하는 점에선 거울에 비친 것처럼 닮았습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도 8일 소수의견에서 바로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여러 주 의회가 연방법원의 판례를 무력화하고 그 판례를 통해 보호되던 권리를 제약하기 위해 일부러 자꾸 법을 만들다 보면, 결국 미국의 헌법도 점점 허울뿐인 조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 존 로버츠 대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