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청부과학’의 진화: 의구심 뿌리기
2022년 4월 15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앞서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왜 미국 사람 중에는 백신 회의론자나 백신을 안 맞으려는 사람이 많을까?’에 관한 글을 몇 편 썼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경제 지표와 체감 경기의 차이에 관한 글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을 찾아봤는데, 여전히 접종을 완료한 사람이 국민의 60%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만 5세 이상 인구 중에는 64%.) 미국에는 여전히 코로나19 백신이 남아돕니다. 오미크론 변이가 본격적으로 퍼질 텐데, 아직도 최소 6천만 명 넘는 백신 회의론자들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은 듯합니다.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의 논리, 마음, 기제를 꿰뚫을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의구심(doubt)’일 겁니다. 각자 드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결국 백신 회의론자들은 과학적 사고를 못 하거나 안 하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과학적인 사실과 동등하게 취급해선 안 되는 주장을 들먹이며, 결과적으로 과학적 사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훼방합니다.

100%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사실 많지 않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일까요? 아니면 과학적 사실 또는 사실에 가까운 증거의 모음을 깎아내리려는 세력이 의구심이라는 풍선에 여기저기 바람을 넣고 다니는 걸까요? 코로나19 백신의 경우 미국 전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그런 태도를 취했습니다. 좀 더 역사가 오래된 사례도 있는데, 담배회사나 환경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기업들이 ‘과학’으로 위장한 편향된 주장을 뿌리고 다닌 이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5년 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를 통해 ‘청부과학’의 민낯이 무엇인지 똑똑히 겪은 적이 있죠.

(주로 기업의) 돈을 받고 과학에 맞서는 주장을 만들어내는 유사과학자들을 파헤친 책 “청부과학(Doubt is Their Product)”을 쓴 데이비드 마이클스가 지난해 초 “의구심의 승리(The Triumph of Doubt)”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오늘은 당시 이 책에 관해 네이처가 쓴 서평을 요약해 소개합니다.

 

데이비드 마이클스가 두 책의 영어 제목에 공통으로 쓴 “의구심(Doubt)”이란 단어는 1969년 공개된 세계 최대 담배회사 브리티쉬 아메리칸 토바코(BAT)의 익명의 경영진이 쓴 악명 높은 메모에서 따온 것입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여러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퍼지자, 담배회사들은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략을 짜냈는데, 이 가운데 과학에 맞설 무기로 꺼내는 것이 바로 의구심이었습니다. 메모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과학적 사실’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바로 의구심이다. 의구심을 널리 퍼뜨리면, 과학적 사실이 사실로 굳어지기 전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거의 예외 없이 많은 돈을 받은) 청부과학자들은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에 직접 반대하는 주장부터 논점을 흐리는 수많은 주장을 쏟아냈습니다. 이후 담배회사, 석유회사, 화학회사 등 수많은 기업은 이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전략을 앞세워 수십 년간 규제를 무마 시켜 왔습니다.

출처=Unsplash

과학적 탐구 과정을 거칠게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확실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 뒤 이를 거듭 검증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 충분한 근거를 모아가는 과정”일 겁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과정은 복잡하고 오래 걸립니다. 가설 하나를 검증하는 데도 몇 년이 걸리기 일쑤다 보니, 전문가들이 합의를 이루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마치 코로나19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가 있다는 증거가 수억 건이 쌓여도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사례 하나가 백신에 대한 불안 심리를 크게 자극하는 것처럼, 과학적 사실을 모으고 검증하는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의구심이 끼어들 틈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담배회사를 비롯해 발암물질을 생산하고 판매하던 많은 기업은 의구심을 뿌리기 위해 청부과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데이터만 취사선택하거나 돈을 댄 기업이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실험을 반복하고 다시 유리한 데이터만 뽑아내 주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역학자인 마이클스는 2008년에 “청부과학”을 펴낸 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오바마 행정부에서 산업안전보건국(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 선임규제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의구심의 승리”는 이때의 경험과 자료를 더해 청부과학자들이 사실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전략에서 의구심을 주입하는 전략으로 진화한 과정을 꼼꼼히 짚습니다. 저자는 또 청부과학에 돈을 댄 기업과 부자들의 이름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해당 목록은 웹사이트에서 검색해보실 수 있습니다.

의구심이 사실을 외면하고 믿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태도를 강화하는 주범이라면, 의구심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정공법도 결국 과학적 사실을 더 충실히 모으고 과학적 사고를 강화하는 일이 될 겁니다. 청부과학의 문제를 파헤치는 일은 마이클스의 책처럼 방대한 자료와 날카로운 통찰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엉터리 과학을 동원해 백신 회의론을 부추기려는 주장은 우리도 누구나 걸러낼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와 관련한 글이나 연구 결과 가운데 흥미로운 게 있으면 앞으로도 부지런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