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허리케인 아이다와 카트리나
원래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글을 월, 수, 금 올리는데, 이 글은 하루만 지나도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화요일에 올린 글이었습니다. 친구와 나눈 카톡 대화로 글을 시작했던 건 지금 봐도 조금 어색하긴 하네요. 소개하고자 했던 얘기는 전혀 가볍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라크 전쟁 때문에 카트리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미국, 빈부 격차에 따라 똑같은 자연 재해로 인한 피해가 너무 달라지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야 잘 사냐, 태풍 큰 거 온다던데 너 괜찮아?”
“응? 허리케인? 그렇네. 아이다(Ida)? 나도 이름 처음 들어보네. 근데 허리케인은 보통 남쪽 멕시코만 근처나 위험하지 뉴욕은 별문제 없을 거야.”
“그래? 예상 진로 보니까 상륙해서 미국 관통한 다음에 뉴욕 쪽으로 빠져나가던데, 아무튼 조심해라.”
한국에 사는 친구가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에서 평소에도 자주 안부를 주고받지만, 개인 톡으로 따로 연락이 온 건 오랜만이기도 했고, 뉴욕에 사는 저도 잘 모르는 소식을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게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나도 잘 모르는 태풍 상황을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어?”
“거기 텍사스 쪽에 특히 원유 시추 시설부터 정유 공장들 싹 다 모여 있잖아. 우리 회사에 엄청 중요한 동네야 거기가. 원자재 확보하고 물량 맞추고 하는 데 차질 생기면 난리 나니까 아주 비상이야. 내가 살다 살다 미국 날씨 채널을 하루종일 보고 있다 야.”
친구는 한국에서 페인트 회사에 다닙니다.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의 공급망이 글로벌 규모로 확대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친구 말을 듣고 찾아보니, 아이다로 인한 인명·재산 피해뿐 아니라 기름값과 소비자 물가 등 경제에 미칠 영향을 다룬 기사도 있었습니다.
8월 29일은 루이지애나주를 비롯한 멕시코만 일대 주민들에게 기억하기 싫은 날입니다.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기록된 카트리나(Katrina)가 16년 전 루이지애나에 상륙한 날이 8월 29일입니다. 상륙 당시 카트리나는 3등급 허리케인이었는데, 실은 나흘 전 한 차례 상륙했다가 다시 플로리다 쪽 멕시코만에서 수증기를 공급받아 강력해진 뒤 두 번째 상륙에서 엄청난 손해를 끼쳤습니다. 홍수와 정전에 이어 강한 바람에 각종 시설물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1,833명이 숨지고 1,250억 달러, 우리돈 150조 원 가까운 재산 피해가 났습니다.
그런 카트리나가 상륙할 당시 3등급 허리케인이었는데, 아이다는 그보다 태풍의 피해 반경은 작지만, 바람 세기는 조금 더 센 4등급 허리케인으로 상륙했습니다. 순간 풍속이 초속 67m로, 우리나라 기상청의 분류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초강력 태풍입니다.
(미국 기상청은 허리케인의 등급을 바람의 세기에 따라 1~5등급으로 나누는데, 5등급이 초속 70m 이상의 바람을 동반한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입니다. 1등급 아래로 내려가면 열대성 저기압으로 부릅니다.)
아이다는 카트리나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루이지애나주의 주도 배튼 루즈(Baton Rouge)와 최대 도시 뉴올리언스(New Orleans)를 관통했습니다. 홍수와 정전이 잇따라 일대 주민 100만여 명이 전기 없이 지난 밤을 보냈습니다.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도 우려되지만, 허리케인이 원유 시추 시설과 정유공장이 모여 있는 지역을 지난 만큼 당장 휘발유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루이지애나주에는 미국 전체 정유공장의 20%가 모여 있고, 특히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소비되는 휘발유의 60%가 걸프만 일대의 정유공장에서 정제됩니다. 이 일대 시추 시설과 정유공장들은 허리케인의 북상에 원유 생산과 공장 가동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아이다가 시설물에 어느 정도 피해를 남겼는지는 뒤에 다시 확인해봐야 하지만, 피해 규모에 따라 주유소의 기름값은 갤런당 10센트, 리터당 약 30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미국은 휘발윳값도 주마다 다른데, 현재 뉴욕주의 휘발유 가격은 평균 갤런당 3.233달러입니다. (리터당 약 995원.)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루이지애나주의 병원들도 특히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 전체에서 코로나19로 입원한 환자는 약 2,400명인 가운데, 병원도 정전을 피할 수 없게 돼 발전기를 가동해 가장 중요한 중환자실의 산소호흡기 등을 가동하며 버텨야 했습니다.
2005년, 카트리나가 덮쳤을 때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었습니다. 지난주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분석한 글에서 소개했듯 미국은 2003년 3월 후세인 정권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단독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뒤 이미 수렁에 빠져 있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했지만, 후세인 정권이 테러 조직에 넘겨줬다던 대량살상무기의 행방은 묘연했고,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일도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본토에서 발생한 허리케인과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던 전쟁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미국의 주 방위군(National Guard)을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미국 육군과 공군의 예비군 성격으로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공동으로 관장하는 주 방위군은 본토를 방위하는 임무에 투입되는데,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지역사회를 지키는 것도 주 방위군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카트리나가 상륙했을 때 인명을 구출하고, 피해 복구에 투입됐어야 할 병력 상당수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있었습니다. 2005년 9월 기준으로 전체 주 방위군 병력의 40%에 해당하는 17만 5천여 명이 군에 예속돼 전장에 있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군 병력의 15%가 주 방위군이었습니다. 세계 2차대전 이후로 주 방위군이 이렇게 많이 동원된 건 이라크 전쟁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인력도 부족했고, 급격히 불어나는 전쟁 비용에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남겨둔 연방 예산을 죄다 끌어다 쓴 탓에 생필품을 비롯한 구호물자도 태부족이었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의 수렁에 빠진 탓에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가 컸던 만큼 카트리나로 인한 사상자를 이라크 전쟁 사상자 집계에 포함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다행히 미국 시각으로 30일 오전 아이다는 세력이 잦아들어 열대성 저기압이 됐습니다.
16년 전 카트리나 때는 허리케인에 대비해 쌓아둔 제방을 비롯한 방재 시설이 속절없이 무너지며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는데, 이번에는 이후에 총 146억 달러를 들여 마련한 대비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으로 보입니다. 뉴올리언스와 배튼 루즈 등 허리케인이 지나간 모든 곳에서 강한 바람과 홍수로 인해 정전 피해가 있었지만, 제방이 크게 무너지거나 미리 사람이 제대로 대피하지 못해 인명피해가 커지는 등의 인재(人災)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글 마지막에 열대성 저기압으로 세력이 약해져 다행이라고 썼지만, 바로 저 열대성 저기압이 며칠 뒤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면서 미국 동북부 일대에 폭우를 내렸고, 물난리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상습 침수지역 저지대의 반지하나 지하에 살던 서민들이었습니다. 뒤에 “기후 재해와 불평등이 빚어낸 환경 인종주의”라는 글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다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