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
‘환경’은 21세기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일 겁니다. 이는 ‘기후변화’가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라는 사실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때는 기후변화가 진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변화가 정말 인간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가 중요한 논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의 연구는 과학계가 위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기후변화는 실재하며 그것이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거의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제, 곧 기후변화에 인류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것입니다. 태양광, 풍력과 같은 대체에너지 역시 같은 차원에서 논의됩니다. 탄소세 논의나 ‘탄소 제로’와 같이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줄여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대안으로 원자력 발전을 주장하는 이와 원자력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이들이 맞서고 있습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쓴 마이클 셀렌버거(Michael Shellenberger)는 인류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기후학자 피터 글릭이 예일기후대응모임에 올린 이 책에 대한 비판과 셀렌버거의 반론은 이 문제가 얼마나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지 잘 보여줍니다.
피터 글릭(Peter Gleick)은 이들의 반목이 오랜 역사를 가진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의 충돌이라 말합니다. 두 용어 모두 긍정적, 부정적 뉘앙스를 동시에 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공평한 명명처럼 들립니다. 글릭은 맬서스주의자의 관점으로 기술만능주의를 비판합니다. ‘미래의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근거가 희박하거나 검증이 불가능한 주장으로 현실의 문제를 덮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미래에 어느 수준의 기술을 가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한 셀렌버거의 반박도 일리가 있습니다. 곧, 그는 기후변화가 어떤 기상 이변을 가져오더라도,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의 수준이 높아져 인명피해가 줄어든다면, 이는 자연재해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반박은 논쟁의 또 다른 측면과 연결됩니다. 곧, 가난한 나라들도 선진국의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그 정도 발전을 이룩하고 그만큼의 에너지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해야만 한다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셀렌버거는 맬서스주의자들이 가난한 나라들이 발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미심쩍은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그 근거로 이야기하는, 과거 100만 명이 사망한 아일랜드 기근과 300만 명이 사망한 벵골 대기근이 영국의 맬서스주의자들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 번 역사를 되짚어보고 싶게 만드는 솔깃함이 있습니다.
왜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과학자들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이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있고, 미래 예측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 신화의 카산드라 이야기가 보여준 것처럼, 예측 자체는 예측 대상의 행동을 바꾸어 그 예측이 틀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혹은 예측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예측 때문에 일어나게 되기도 하며, 이는 여러 영화나 소설에서 종종 쓰이는 흥미로운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맬서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예측이 결국 틀린 이유로, 맬서스의 경고가 사람들의 인구 폭발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고 따라서 식량 증산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결과 맬서스의 예측이 틀리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식량 증산 예측과 같이 지난 과거를 통해 미래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의 논의에서, 비록 기후변화가 식량 생산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앞으로 계속 생산량이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 동의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식량 문제에 대해서는 기술만능주의가 맬서스주의를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자력에 관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에너지의 생산비용이나 탄소의 배출량으로는 원자력이 아직 대체에너지들보다 유리합니다. 하지만 원자력은 폐기물 처리 비용처럼 비용을 산정하기 무척 까다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또, 태양광이나 풍력과 같은 신재생에너지는 발전량의 변동성이 커 기저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자력에는 단순히 비용과 효율만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있습니다. 당장, 원자력 폐기물을 어디에 보관할지의 문제뿐 아니라 발전소 자체를 어디에 지을지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공포가 비합리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비합리성까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문제에서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논의 자체에 여러 관련 산업의 흥망이 달렸고, 정부의 예산이 결정되며, 곧 생업과 이해관계가 걸린 수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됩니다. (물론 셀렌버거의 주장처럼, 오늘날의 환경주의가 후진국의 발전을 반대하는 선진국 중상류층의 종교가 되었다면, 좌파와 우파는 서로 자리를 바꾸어야 할지 모릅니다.)
가디언은 2018년, 이런 커다란 문제들과는 별도로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소개했습니다. 곧, 에너지를 절약해 기후변화를 막는 데 도움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도 유익한 행동들 말이지요. 예를 들어 소고기를 덜 먹는 것입니다. 육식보다 채식을 많이 한다면 환경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집안의 온도를 유지하는 데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쓰인다는 점에서 외풍을 막거나 단열 처리를 제대로 하는 것도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냉ㆍ난방비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습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