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쓰이는 제품에 숨어 있는 차별
2021년 8월 13일  |  By:   |  문화  |  No Comment

(미디엄, Stark R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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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특권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 눈에만 또렷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게 특권인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른손잡이는 가위를 사용할 때 아무런 문제를 못 느낍니다. 멀쩡한 가위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될 수 있을지 미처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대부분 사람이 오른손잡이니까 오른손잡이용으로 만든 대부분 가위를 ‘멀쩡한 가위’라고 지칭한 이 표현에도 오른손잡이인 옮긴이의 편견이 드러난 듯합니다.)

같은 자동차, 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이 안전벨트를 맨 채 같은 사고를 당해도 여성이 더 심하게 다칠 확률이 높습니다. 안전벨트가 성인 남성의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고안됐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를 위한 맞춤형 제품인 듯 편리한 물건을 쓸 때는 그 제품의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 제품이 꼭 맞을 거로 생각하게 되죠.

엄연한 차별이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이 본의 아니게 차별을 가하는 쪽, 억압하는 편에 서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인종에 따라 사용자 경험이 아주 다를 수 있는, 나도 모르는 사이 차별이 녹아 있는 제품 여섯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선글라스

선글라스는 백인의 얼굴에 맞춰 디자인됐다? 백인들은 처음 듣는 말일지 모르지만, 유색인종 가운데는 이 문제를 지적해 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특히 코받침 디자인이 백인들의 좁고 높은 콧날에 맞춰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코가 넓고 낮은 사람들이 쓰면 잘 어울리지도 않고 잘 흘러내리거나 오히려 꽉 끼곤 한다는 겁니다. 흑인들을 위한 안경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 리프레임드(REFRAMD)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흑인은 물론 그동안 선글라스 디자인에서 간과되고 배제된 이들을 위한 새로운 선글라스를 만들겠다”는 것이 리프레임드의 포부입니다. 이들은 킥스타터를 통해 4만5천 달러, 약 5천만 원을 모았습니다.

 

2. 밴드에이드

밴드에이드 색깔은 아무렇게 정한 게 아니라 피부색과 비슷하게 디자인됐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보호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목적도 있던 겁니다. 문제는 피부색 혹은 “살색”이 하나일 수 없다는 데 있죠. 살색을 특정 색으로 규정하는 순간 살색은 지독한 인종차별의 용어가 되고 맙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밴드에이드는 짐작한 대로 다분히 백인의 하얗고 밝은 피부톤에 맞춰져 있습니다. 존슨앤존슨이 개발한 밴드에이드(Band-Aid)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는데, 지난해 밝은 톤부터 어두운색까지 다양한 색깔의 밴드에이드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존슨앤존슨은 다양한 색깔과 톤의 밴드에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에 ‘살색’을 넣고 돌려보면, “‘살색’에 대하여 인종차별 문제가 제기되어 2005년 5월에 ‘살구색’으로 관용색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기술표준원, KS규격]” 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3. 심박 수 측정기

당신의 심장 박동 수를 감지, 측정하는 소비자용 기기 대부분은 혈관에 흐르는 피의 양을 광학 센서로 측정해 심박 수를 계산해 내는 방식을 씁니다. 심박과 심박 사이에 손목에 동맥을 흐르는 피의 양이 가장 적을 때가 있는데 이때를 매번 체크해서 심박 수를 재는 거죠. 문제는 멜라닌 색소가 많은 피부색일수록 녹색 빛을 가로막게 돼 광학 센서가 동맥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피의 양도 제대로 측정 못 하고, 자연히 심박 수도 정확하지 않게 나오겠죠. 피부색이 어둡고 짙을수록 심박 수 측정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화장품

밴드에이드의 문제를 살펴볼 때도 “살색”이란 개념의 문제점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화장품 산업은 문제투성인 “살색”의 개념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대표적인 산업입니다. 당장 유색인종 고객은 색조 화장에 필요한 기초 화장품도 마땅한 걸 찾기 어렵습니다. 유색인종이 쓰기 좋은 제품이 없는 건 아닌데, 많은 화장품 가게가 재고를 채워 넣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언론인 탄시 브레시어스가 화장품 업계에서 2년 가까이 일한 경험을 랙트에 풀었는데, 화장품 업계의 인식이 어떤지 글에 잘 드러납니다.

일하는 내내 매달 최소 두 번씩은 상관에게 건의했던 것 같다. (회사 상관들은 짐작하시다시피 다 백인이다) 우리 가게에도 유색인종 여성이 쓸 수 있는 화장품을 들여놓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마다 똑같은 답이 돌아왔는데, “그 제품은 진열해놓기 무섭게 손님들이 몰래 훔쳐 가더라.”는 말이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종차별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5. 살색 크레용

2013년, 인도의 한 법학대학원 학생이 인도 최대 문구 제조업체를 고소했습니다. 이 회사의 제품 가운데 크레용에 ‘살색’이라고 표기된 색이 있는데, 그 색깔이 은은한 복숭앗빛을 띠는 하얀색으로,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고소인은 ‘살색’을 버젓이 판매하는 제조업체가 백인 우월주의를 강화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원래 정상인의 피부란 하얀색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은연중에 심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회사의 ‘살색’ 크레용을 쓰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자기 피부색은 하얗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낄 당혹감이나 좌절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동안 인도에서 수없이 문제로 지적된) 금발, 백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동경을 어렸을 때부터 부추기는 것 아닌가?”

 

6. 자동 비누 기계

손을 아래에 가져다 대면 자동으로 비누가 나오는 기계는 근적외선 기술을 사용합니다. 센서가 가시광선 밖에 있는 빛을 보내고 반사돼 돌아오는 빛을 분석해 사용자가 손을 대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품을 만들 때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험하지 않은 경우 백인의 손이 아니면 잘 인식을 못 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그저 아이들이 쓰는 크레용에 색깔 표기 하나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제품에 이런 차별과 편견이 녹아있는 경우 유색인종은 그 물건을 쓸 때마다 ‘세상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타자화되는 겁니다. 숫자가 적다고 무시당하고 차별받아도 안 되지만, 심지어 지구상에는 백인보다 유색인종이 더 많이 삽니다. 현대 사회의 기술 발전을 백인이 주도해왔다고 해서, 백인이 경제적으로 발전된 선진국, 강대국의 지배계층이라고 해서 이런 차별이 용인될 순 없습니다.

디자이너들에겐 차별에 맞서 싸우고, 모두가 불편하지 않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산업디자인 업계에도 다양한 인재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업계 사람들 모두가 인종차별, 성차별 등 각종 부당한 차별에 경각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를 지적해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