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글릭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저: 마이클 셀렌버거)” 비판(1/2)
(피터 글릭, YaleClimateConnections)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테규 집안과 캐퓰릿 집안을 생각하면 됩니다. 아니면 1863년에서 1891년 사이, 서로 원수지간이던 웨스트 버지니아와 켄터키주의 햇필드와 맥코이 가문을 생각해도 됩니다.
환경 과학, 인구 증가, 자원 부족, 생태학 분야에서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Cornucopian) 사이의 지난 수십 년 간의 갈등이 이와 비슷합니다. 맬서스주의자들은 영국의 경제학자인 토마스 맬서스가 이야기했던, 지구 자원의 한계는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기술만능주의자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의 뿔(Cornucopia)”처럼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필요를 메꾸어줄 뿐 아니라 무한한 경제성장과 인구 증가가 더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비판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 사이의 학술적 논쟁과 충돌은 200년이 넘도록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탈삼림화(deforestation), 종의 멸종, 인구 압박,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공중보건의 위기를 중심으로 점점 더 극단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위의 문제들이 가진 복잡성과 연관 관계가 더 명확해졌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지역적, 국가적, 전지구적 행동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셀렌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또한 이 논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셀렌버거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비이성적이고 과장된 맬서스주의자의 재난에 대한 경고를 반박하기 위해, 우리가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 그리고 더 많은 자연 자원의 활용에 주력한다면 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만능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입장의 허먼 칸, 줄리안 사이먼, 비외른 롬보르의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도가 지나친 기후변화 담론(?)
셀렌버거는 자신을 환경주의 행동주의자이자 “긍정적, 인간적, 이성적 환경주의의 적인 과장과 경고를 일삼는 극단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사실과 과학을 세상에 전달하는 이로 소개합니다. 그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기후변화에 대한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 도를 지나치고 있기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구가 처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논쟁적 주제에 이성적 목소리와 명확한 분석을 추가하는 것은 늘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심각한 오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이 책에는 수많은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가 등장합니다. 셀렌버거는 과학자, “교육받은 엘리트”, “언론인 활동가”, 저명한 환경주의 행동가들이 지구의 종말이 오고 있다는 틀린 사실을 믿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인 원자력 에너지와 끝없는 경제발전을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설사 그가 지금 지구가 처한 위기의 본질과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고 – 물론 그렇지 않지만 – 제대로 된 과학적 결과를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 그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기술만능주의자가 가진 과도한 단순화, 곧 경제 성장과 이에 따라 등장할 만능의 기술에 모든 것을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H. L. 멩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잘 알려진 해결책이 늘 존재한다. 바로 멋지고, 그럴듯한, 그러나 틀린 해결책이다.” 멩켄은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기후 위기나 팬데믹, 환경 변화와 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필요한 충고일 것입니다.
잘못된 과학의 적용, 허수아비 때리기, 사실의 체리 피킹, 인신공격
하지만 이 책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저자는 여러 주제를 어지럽게 오가며 자신의 경험과 논증,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지지하는 자료만을 골라 제시하는 방식으로 독자가 그의 주장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올바른 과학적 자세인, 데이터와 사실을 바탕으로 이론을 검증하고 주장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입장을 먼저 정한 다음 그 입장에 맞는 데이터와 사실만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책에는 논리적 오류와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논증, 허수아비 때리기, 사실의 잘못된 사용과 선택적 체리 피킹, 그리고 과학적 오류와 실수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게다가 이 책은 과학자들과 환경주의자들, 언론에 대한 볼썽사나운 인신공격으로 점철된, 분노로 가득 찬 책이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책의 오류 중 몇 가지만 지적하려 합니다. 아마 모든 오류를 지적하려면 책을 한 권 새로 써야 할 것입니다. 짧게 말해, 이 책에서 새로운 내용은 틀렸고, 옳은 내용은 이 책이 처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핵심에는 기술만능주의의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장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환경의 문제는 가난의 결과일 뿐 모든 이가 부유해지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이미 논파한 바 있습니다. (여기 여러 예가 있습니다.)
원자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
두 번째 주장은 셀렌버거가 예전부터 해오던 것으로, 기후 및 에너지 문제는 원자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태양광이나 풍력이 아닌 원자력만이 값싸고 안정적인, 풍부한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자력만이 인간의 환경 발자국을 줄이면서 고에너지 문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원자력에 대한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반론을 그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단순하게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폐기물은 전기 발전에 따른 폐기물 중 가장 안전한 최선의 폐기물에 해당한다. 이 폐기물은 아직 누구도 해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원자력만이 (어쩌면 아프리카 콩고강에 건설을 주장하는 초대형 댐까지)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라 주장하며, 이는 재생에너지 – 그가 “신뢰할 수 없는”이라 부르는 – 가 규모도 작고 간헐적이며,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뒷받침됩니다.
가난과 환경 문제가 서로 엮여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이는 국제 개발의 기본 상식으로, 초기 UN밀레니엄개발목표(United Natio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와 지금의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도 다음과 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모든 이들이 더 나은, 더 지속가능한 미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난, 불평등, 기후 변화, 환경 파괴, 평화와 정의라는 전지구적 위기의 고려가 필요하다. 이 17개의 목표는 모두 서로 엮여있다.”
주류 환경과학과 환경경제학은 다양한 에너지원이 복잡한 환경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고려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위기평가, 통합환경시스템분석, 생태경제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를 다루어왔습니다.
수많은 허수아비 때리기
셀렌버거는 다른 문제에도 계속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을 사용합니다. (허수아비 때리기란 상대의 진짜 주장이 아닌 다른 주장을 만들어놓고는 이를 논파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기후 변화 논쟁에서 가장 흔한 허수아비 주장은 과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최근 극단적인 기상 사태의 “원인”이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후과학자들은 “원인”과 “영향”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합니다. 이는 “귀인 과학(attribution science)”이라는, 오늘날 기후 연구의 가장 활발한 분야입니다.
셀렌버거는 사람들이 최근의 극단적인 기상 사태(산불, 홍수, 폭염, 가뭄)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돌리고 있다는 허수아비 주장을 세운 뒤, 이 주장을 반박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캘리포니아 산불의 원인으로 기후 변화를 지목한다”고 한 뒤 “호주의 산불은 호주의 기온이 오르지 않았더라도 발생했을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가 2019년 아마존 산불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인용하며 언론이 화재를 어떻게 보도하는지에 관해 쓴 내용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아마존 산불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산불은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다’라고 제대로 보도했다”. 하지만 셀렌버거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을 고른 것입니다. 그 기사를 실제로 찾아보면 바로 두 문장 뒤에 “영향”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이 산불들은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다. 크게 보면 인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산불을 더 크게 만들었을 수 있다. 높은 기온과 건조한 공기는 산불을 더 뜨겁게, 그리고 더 빨리 퍼지게 만들 수 있다.”
그는 기후 변화와 극단적 기상 사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 또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후 변화는 아직 이런 다양한 극단적인 사건들의 빈도를 증가시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15년 전 발표된 연구로 이후 많은 연구가 추가되었습니다. 실제로 허리케인, 폭염, 홍수, 빙하 소멸 등의 극단적인 사건과 기후 변화 사이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9년 미국기상학회(AMS)는 13개 국가의 과학자 121명의 연구를 포함한, 2018년의 극단적인 기상 사태 분석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과 이베리아반도와 북동아시아의 폭염, 미국 중부 대서양 주의 폭우, 베링해의 기록적으로 낮은 빙하의 크기 등이 극단적인 기상 사태의 예였으며, “이들은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AMS의 편집장인 제프 로젠펠드는 “우리는 지금까지 100건 이상의 귀인 연구를 게재했고, 이 분야의 과학적 정당성을 보였다. 귀인 연구는 실제 세상의 복잡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점점 더 유용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연구들은 기후 변화에 인간의 영향이 있음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생물종의 멸종에 관해서도 심각한 개념적 오류를 보입니다. 이를 다룬 장에는 멸종률, 생태계와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지질학적 시간 척도 개념, 그리고 데이터의 오용이 한데 뒤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셀렌버거는 “종 부유도(richness)”와 “종 다양성(biodiversity)”을 혼동하고 아래와 같은 황당한 주장을 펼칩니다.
“‘외래종(invasive species)은 실제로 세계의 섬 지역 종 다양성을 평균적으로 두 배가 증가시켰다. 새로 도입된 식물종의 수는 멸종된 식물의 수의 100배가 넘는다.”
이 논리에 따르면 10종의 고유종 조류가 살던 섬에 이들이 모두 멸종하고 20종의 외래종 조류가 들어왔을 때 그 섬의 “종 다양성”은 두 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이런 모순은 그가 자신이 인용한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숫자만을, 종 다양성이 아닌 종 부유도만을 보았기 때문이며, 외래종이 고유종을 멸종시키고 생태계 안전성을 약화시키며 동식물을 균질화시키는 등의 종 다양성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한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