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올스타전 개최지 변경과 투표할 권리
2021년 4월 7일  |  By:   |  스포츠, 정치  |  No Comment

(복스, Cameron Peters)

참고기사

복스 팟캐스트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MLB) 사무국이 지난 2일 2021년 올스타전과 신인 드래프트 행사를 원래 열기로 한 애틀란타에서 열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MLB 사무국은 애틀란타가 있는 조지아주가 지난주 유권자의 투표를 더욱 어렵게 만든 투표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번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계속되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 초기에 미국 의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투표 억압(voter suppression)에 관련한 투표권법 문제일 겁니다. 공화당은 부정 투표를 막기 위해 투표하러 온 유권자의 신원을 더욱 엄격하게 확인하는 등 필요한 진입장벽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편 투표를 어렵게 하거나 투표소를 줄이는 등 투표하기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면 영향을 받을 유권자 가운데 민주당 지지 성향이 큰 유색인종이 많다는 계산이 깔린 전략이죠. 반대로 민주당은 공화당의 이런 움직임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투표할 권리를 더욱 강력히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MLB 사무국이 올스타전과 신인 드래프트 행사를 애틀란타에서 빼면서 주 의회에서 여당이자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가 속한 공화당을 보이콧한 겁니다. 이미 법안이 통과된 뒤 델타 항공, 코카콜라, 마이크로소프트 등 조지아주에 본사가 있거나 공장, 지사가 있는 유명 회사들이 법안을 규탄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역자: 다만 델타나 코카콜라 등 조지아주를 상징하는 기업들은 주 의회가 개정안을 논의하는 단계에서부터 논의에 참여했습니다. 개정안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다가 전국적으로 역풍이 거세게 일자 그제야 돌연 태도를 바꿔 투표할 권리를 억압하는 법에 반대한다는 규탄 성명을 내자, 주 의회의 공화당 의원들은 기업들이 배신해 뒤통수를 쳤다며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종의 상징적인 복수로 조지아주에 본사를 둔 델타에 오랫동안 지원해주던 유류 할증료 감면 조항을 삭제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한 의원은 “얼마 전에 펩시콜라 마셔봤는데, 맛이 괜찮더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코카콜라 본사가 있는 조지아에선 듣기 힘든 말이죠. 이런 내용은 5일 업로드된 복스의 팟캐스트 Today, Explained의 “MLB to Georgia: You’re Out!” 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새 법안은 우편 투표의 신분증 규정을 까다롭게 강화해 투표를 어렵게 만들고, 선거관리 관련 권한을 대거 주 의회로 넘겼습니다. 주 선관위(State Election Board)를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이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됐는데, 조지아주 공화당은 먼저 투표소에 줄을 선 유권자들에게 물이나 음식을 제공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역자: 대개 10분 안에 투표를 마칠 수 있는 우리나라 투표소와 달리, 미국에선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새로 바뀐 법은 주로 저소득층과 유색인종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을 것입니다. 조지아대학교의 카스 머드 교수가 이 법을 한 마디로 “반민주적”이라고 규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올해 올스타전과 신인 드래프트 장소를 다시 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야구는 기본적으로 모든 미국인이 투표할 권리를 지지하며, 투표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합니다. – MLB 커미셔너 롭 맨프레드 성명

지금까지 야구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 리그도 주나 도시의 결정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주요 행사를 취소하거나 보이콧한 적이 있습니다. 피닉스(Phoenix)가 있는 애리조나주는 1993년 슈퍼볼 개최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애리조나주가 마틴 루터킹 데이를 유급 휴가를 받을 수 있는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자, NFL의 가치에 위반한다며 슈퍼볼 개최지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겁니다. 2017년엔 NBA가 올스타전을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Charlotte)에서 열려던 계획을 취소합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의회가 성 소수자를 위한 공중화장실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항의 표시였습니다.

 

공화당 의원들은 즉각 MLB의 결정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법안에 서명한 켐프 주지사는 MLB를 향해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이 좌파의 선동에 휘둘려 두려움에 굴복한 결과”라고 비난했습니다. 올해 초 결선투표에서 접전 끝에 조지아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존 오소프, 라파엘 워녹 두 상원의원은 공화당이 투표권을 억압하려 했기 때문에 초래된 안타까운 일이라고 논평했습니다.

켐프 주지사와 주 의회 공화당은 흑인 유권자들이 투표하기 어렵게 법을 바꿨다. 인종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법을 만들고 통과시킨 공화당 의원들도 당연히 알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투표권을 억누르려 한 저열한 공격 탓에 지역 경제마저 피해를 보게 생겼다. – 존 오소프 상원의원

조 바이든 대통령도 “투표권은 절대로 침해되어선 안 되는 권리”라며, MLB의 결정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조지아주의 새 투표권법을 악명 높은 인종차별 법안인 짐 크로(Jim Crow) 법의 21세기 버전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연방 법무부가 투표권을 억압하려는 주 정부의 시도를 막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야구 자체를 보이콧하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MLB를 비롯해 이번 결정에 반발하고 나선 모든 회사의 제품을 불매운동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원의 제프 던컨 의원(공화, 사우스캐롤라이나)은 메이저리그에 적용하고 있는 반독점법 예외 조항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습니다.

 

조지아주에 본사가 있는 델타 항공이나 코카콜라가 법안을 개정하는 과정에 관여했고, 처음 투표권법 개정안이 발효됐을 땐 모호한 반응을 보이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부랴부랴 규탄 성명을 낸 데 반해 미국 내 다른 곳의 회사들은 좀 더 일찌감치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투표권을 억압하는 법안은 주로 남부 주 의회의 공화당이 발의하는데, 텍사스도 대표적입니다. 텍사스주에도 본사를 둔 회사들이 많죠. 이 가운데 아메리칸 항공(American Airlines)과 델(Dell Technologies)은 텍사스주 의회에서 논의 중인 투표권법 개정안(SB 7)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해당 법은 조기 투표, 부재자 투표를 어렵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지난 1일 주 하원을 통과했습니다.

아메리칸 항공의 의견을 분명히 밝혀둔다. 우리는 이번 법안(SB 7)을 비롯해 미국인이 투표할 권리를 억압하는 어떠한 법안에도 강력히 반대한다. 텍사스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서 우리는 우리 직원과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고향 텍사스를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기여할 책무가 있다. 투표할 권리는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 확대해 온 신성한 권리다. – 아메리칸 항공

텍사스에 본사가 있는 AT&T와 사우스웨스트 항공도 지난 3일 투표할 권리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SB 7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투표권법은 얼핏 기업 활동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주나 도시의 평판이 달린 문제인 만큼 정치권이 기업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텍사스주 하원의장을 지낸 조 스트라우스는 지난 1일 트위터에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투표권법을 강행 처리하면 적잖은 후폭풍이 불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텍사스주 일자리의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투표 억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고 있다. 텍사스는 조지아주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 기업들은 평판에 부담이 되므로 텍사스를 꺼릴 수 있으며, 이는 여러모로 텍사스주의 시민들에게도 좋지 않다. – 조 스트라우스 전 텍사스주 하원의장

기업들의 잇따른 보이콧은 비슷한 법안이 발의됐거나 계류 중인 다른 주 의회의 논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2020년 대선 기간 내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부정 투표, 대대적인 사기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발맞춰 공화당이 여당인 주 의회 차원에서 투표권을 억압하는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지난 3월 24일 기준으로 유권자의 투표를 방해하는 투표 억압 법안은 미국 내 47개 주에서 무려 361건이나 발의됐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법안이 발의된 건 텍사스, 조지아, 그리고 애리조나주입니다.

MLB처럼 투표 억압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기업, 단체는 많지 않지만, 트위터, HP, MLB, 페이팔, 우버를 비롯해 100개 넘는 주요 기업들은 민주시민 연합(Civic Alliance)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투표 억압을 규탄하는 성명에 이미 서명했습니다. 성명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투표하기 위해 더 오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등 투표하기 어려워진다면 우리의 선거 제도는 나아지지 못하고 후퇴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주와 연방 의회에 있는 선출된 지도자들이 당리당략을 떠나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투표에 참여해 민주주의를 지켜갈 수 있도록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