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시아 외교 질서 회복과 미국의 역할
2021년 2월 17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책 제목은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부제는 “1812~1822년의 메테르니히와 캐슬레이, 그리고 평화의 문제”다. 키신저는 이 시기 유럽 외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두 명―영국의 캐슬레이 외교장관과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피폐화된 유럽에서 주요 국가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 덕분에 유럽은 181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00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는 평화와 번영의 세기를 누렸다. 이 책의 통찰은 오늘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상황에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다. 특히 강대국들이 갈수록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그만큼 지역의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복된 세계”에서 교훈을 얻자는 말이 당장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19세기 유럽처럼 강대국 위주의 협의체를 구성하거나 미국과 중국이 화해 모드에 돌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 지금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지역의 질서는 균형(balance)과 정당성(legitimacy)을 유지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 점이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무너진 혹은 흔들리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지점도 결국 균형과 정당성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캐슬레이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고, 메테르니히는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애썼는데, 당시 이른바 빈 체제에 참여한 회원국들이 보기에 균형과 정당성이 잘 유지되는 체제를 따르는 편이 더 나아 보였고, 그 결과 체제도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19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오늘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적용할 만한 교훈이나 전략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필요하다. 둘째, 지역의 국가들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질서가 필요하다. 셋째,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균형과 정당성을 무력화하려는 나라가 중국인데, 중국은 탄탄한 동맹과 역내 국가들이 연합을 이뤄 견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19세기처럼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의 각축장으로 전락하지 않고, 21세기에 걸맞은 균형 잡힌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과거는 아시아의 미래?

이 질문은 20년 전에 프린스턴대학교의 애런 프리드버그 교수가 던진 질문이다. 당시에도 통찰력이 담긴 명제라는 평가를 받은 이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19세기 유럽과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공통점이 많다.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나라가 있고, 기존 강대국들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조성될 수 있는 불씨가 여러 군데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가 발흥하고,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정치 체제 사이에도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제어하고 관리해야 할 지역의 정치제도는 빈약하다.

그렇지만 차이점도 있다. 19세기 초 유럽과 달리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곳곳이 혁명으로 뒤숭숭하지도 않고, 주요 강대국끼리 전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이미 지난 40여 년간 큰 전쟁이 한 차례도 없었다. 기준에 따라 이미 오래 평화를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유럽보다 지금의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훨씬 더 서로 연결돼 있다.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또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서로 의존도가 훨씬 더 높다. 예를 들어 역내 국가들의 무역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에서 사고파는 무역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동시에 미국의 번영과 성장에도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이익이 걸린 지역이다. 19세기 초 유럽 국가들은 사실상 서로 협력하는 제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새로 체제를 구상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 주어진 과제는 다르다. 기존에 이미 잘 작동해온 시스템을 바뀐 상황에 맞춰 강화하고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재 체제는 역내 국가들의 경제 교류를 활발히 장려했고, 그 덕분에 상호의존도를 높여 무력 충돌을 억제해왔다. 이 점이 19세기 유럽의 체제보다 진화한 점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만들어진 지역의 질서는 법치와 안보, 경제 발전을 잘 조합해 근간으로 삼았고, 그 결과 수백만 명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각국은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고 상당한 부를 쌓았다. 이를 가능케 한 몇 가지 핵심 원칙이 있다. 항해의 자유, 주권 국가들끼리 평등한 관계, 투명성, 분쟁의 평화로운 조정, 계약을 지키는 일, 역내 국제 무역의 보장,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한 경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규범 등이 여기에 속한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곳곳에 군사 기지를 두고 미군을 주둔해왔는데, 미군의 가치와 사명은 역내 동맹국들이 위에서 언급한 원칙을 지키고 강화해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균형과 정당성을 위협하는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됐다. 하나는 중국의 부상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군사력 강화는 그 자체로 역내 균형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이미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 GDP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군사비 지출도 절반이 중국이다. 중국의 비중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계속 커지고 있다. 기존의 힘의 균형을 깨고 부상하는 강대국은 으레 주변 환경을 바꿔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 한다. 중국 공산당이 이 목표를 위해 취한 정책들은 거의 다 기존의 지역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지어 영토 분쟁을 일으켰고, 동중국해에서 수시로 군사 훈련을 했으며, 인도와는 국경에서 분쟁을 벌였다. 대만에는 침략하거나 합병하겠다는 위협을 가했으며, 홍콩과 신장 지역에선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며 감시 체계를 강화했다. 여기에 최근 호주를 향해 경제 제재를 가하는 등 중국이 경제적으로도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펴면 지역의 질서를 뒷받침하던 원칙들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의미에선 당혹스럽다. 다름 아닌 지금의 아시아태평양 외교 질서를 고안했고, 앞장서서 뒷받침해온 미국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 안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기존 외교 질서를 거의 모든 측면에서 헤집어놓고 허물어뜨렸다. 일본이나 한국 등 주요 동맹국들에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라며 터무니없는 액수를 청구했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액수를 내지 않으면 주둔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오랜 세월 굳건히 지켜온 동맹 관계에 균열을 냈다. 미국이 주도하는 탄탄한 동맹은 이 지역 힘의 균형을 위해 꼭 필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다자간 대화가 필요한 지역의 문제나 경제 협력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불참했다. 미국이 떠나며 발생한 공백은 중국엔 자연스럽게 역내 영향력을 높일 기회가 됐다. 중국은 미국이 짜놓은 질서의 정당성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보루 역할도 방기했다. 미국은 인권 문제와 관련해 손을 잡아 오던 동지를 잃었고,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가 홍콩이나 신장 지구의 자국민을 억압하고 탄압할 빌미를 주고 말았다.

노골적으로 패권을 노리는 중국과 무책임하게 주저하는 미국의 조합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정세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분명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20세기 초의 유럽과 비슷한 면이 있다. 힘의 균형은 위태로워 보이고, 질서도 곳곳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협력하려는 구심점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바이든 행정부가 이 지역의 운영 체제를 되살리고 평화와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오려 한다면 각각의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균형의 회복

키신저는 “회복된 세계”에서 “힘의 균형”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물리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안전장치 없이는 그 어떤 질서도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훈은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중국이 부강해지면서 지역의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균형이 위태로워질수록 중국은 영토를 넓혀가려는 야심을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를 적절히 견제하고 억누르지 못한다면 중국은 마침내 이 지역의 오랜 평화를 깨트릴 것이다.

중국과 지역 내 다른 나라들 사이의 국력 차이는 눈에 띄게 벌어졌다. 중국은 지역 내 다른 국가들이 지출하는 국방비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국방비로 쓴다. 중국은 초음속 미사일이나 “스마트” 지뢰 등 이른바 접근 금지/지역 파괴 무기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다분히 미군이 중국의 앞마당과도 같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쉽게 드나들지 못하게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다. 중국은 또 해군이나 해병대, 세력 투자 능력 등을 전방위적으로 강화하며 군비 지출을 늘렸다. 중국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인도나 일본, 대만,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을 향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췄다.

미국은 중국의 영토 욕심을 억제하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하지만, 동시에 너무 비싸고 유지하는 비용도 많이 드는 항공모함 같은 전력을 유지하는 데만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훨씬 더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중국을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래식 장거리 탄도 미사일, 무인 폭격기, 잠수정, 잠수함과 유도 미사일, 고속 타격 무기. 하나같이 중국이 오랫동안 미국을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그럴 수 없던 무기들이다. 이런 재래식 무기에 투자해 중국을 군사력으로 압도한다면 중국 정부도 전력 차를 다시 계산해보고 노골적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도발에 나서는 전략을 다시 검토할 것이다.

진정한 힘의 균형은 미국 혼자서 이룰 수 없다. 당연히 동맹국과 우호 세력을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중국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최전선에 미군을 계속 주둔하는 등 역내에서 존재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군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인도양 전역에도 적절히 파견해야 한다. 이는 현재 동아시아 몇 곳에 집중된 미군의 전력을 다변화해 유사시 적국의 공격 목표를 분산하는 효과가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지역 내 여러 국가와 새로운 군사, 첩보 동맹을 맺어야 한다. 미국이 중추적 역할을 해온 기존 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이를 토대로 새로운 동맹을 끌어들이는 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역량을 강화해줄 것이다.

 

정당성의 회복

군사력을 이용해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지역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다. 키신저도 모든 국제 체제는 궁극적으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바로 설 수 있다고 썼다. 그 체제에 참여하는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체제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당성을 입증하고 회복하는 데도 미국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19세기 유럽과 달리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은 국제정치나 안보 문제만 해결해서는 이룰 수 없다. 무역, 기술, 국가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에반 피젠바움 부회장이 말한 것처럼 아시아에는 안보와 경제라는 두 목표를 중시하는 세력이 섞여 있다. 중국이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은 전자를 위협하고, 경제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행위는 후자를 위협한다. 아무런 대책 없이 아시아를 방치해둔 트럼프 행정부의 처신은 아시아의 안보와 경제 두 가치를 모두 위협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번엔 다르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내지 못한다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은 기존의 질서가 부당하다고 보기 시작할 것이고, 중국이 추구하는 새로운 질서에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 21세기에 어울리는 질서 대신 아시아를 19세기 유럽처럼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던 아시아 대륙은 편을 갈라 싸우고 반목하는 지역이 될 것이다. 외부의 도움을 거절하고, 분쟁이 생기면 평화적인 수단 대신 무력으로 해결하며, 상호의존하고 상생하는 경제가 아니라 서로를 억누르고 제재하는 경제가 자리 잡을 것이다. 미국의 동맹은 약화할 것이며, 작은 나라들은 주권을 위협받고, 자유도 보장되지 못할 것이다.

이 흐름을 바꾸는 일은 무척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고도의 외교적 수완, 상업적 혁신, 제도적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한다. 먼저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는 현행 체제의 정당성을 다시 입증하고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다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적극적인 개입은 최소한일 뿐이며, 동맹을 흔들고 역내 정상회의를 제멋대로 거르며, 경제 협력이나 국가 간 협력 자체를 회피하고 무시하던 지난 정권의 태도를 싹 바꿔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 미국은 역내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아시아 국가들에 중국의 야망에 맞설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질서를 되살리고 강화한다는 건 곧 현 체제에 참여하는 국가들에 물질적인 보상을 보장한다는 뜻이 된다. 중국이 갈수록 커지는 경제력을 활용해 다른 나라들을 대상으로 당근과 채찍을 더욱 정교하게 이용하는 상황에서도 역내 국가들은 현 체제를 지키는 쪽이 이득이라는 판단이 서야 한다. 19세기 유럽 국가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가장 중요한 쟁점은 역시 국경을 긋는 문제와 정치적인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경제적인 이슈가 더 중요하다. 공급망, 각종 표준, 투자 제도, 무역협정 등을 두고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의 기준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미국은 제조업을 비롯한 몇몇 민감한 업종의 기업들에 본사와 공장을 본국으로 이전하도록 유인책을 쓰고 있고, 전략적으로 경제 각 부문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에서 배제되면 먹고 살길이 막히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에 미국은 그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더 좋은 공급망의 일원이 될 기회를 잡고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중국은 일대일로 계획을 통해 아시아 전역에 거대한 인프라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인프라 구축에 드는 비용을 중국이 공격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에서 미국도 그에 못지않은 재정과 기술 지원에 나서야 한다.

결국엔 중국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제약할지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급속도로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중국을 두려워하며 미국이 자국의 주권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아시아의 미래에서 중국을 아예 배제하고 가는 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아시아 공동의 이익에도 해가 되는 전략이란 것도 잘 안다. 그렇다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도 이들에겐 피하고 싶은 미래다.

미국이 역내 다른 나라들과 함께 중국을 설득할 수 있다면, 더 나은 해결책도 가능하다. 몇 가지 요건만 충족된다면 역동적이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아시아의 일원으로 남는 쪽이 중국에도 이익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여기서 몇 가지 요건이란 중국이 지역 질서에서 점유할 위상,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구에 중국이 회원국으로 참여할 것, 중국이 공동의 원칙과 규범을 지켰을 때 자유로운 경제 활동 보장, 기후변화나 인프라 구축, 코로나19 방역 등 공동의 문제에 함께 대처했을 때 여기에 대한 보상 등이다. 중국은 그동안 아시아의 공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앞으로도 중국의 중요성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질서를 되살리려는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비전에 중국의 행동이 거슬릴 수밖에 없는 분야도 있다. 이에 미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와 제도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중국에는 생산적으로 아시아에 기여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유인책을 던져야 한다. 반대로 중국이 질서를 훼손하고 아시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하면 어떻게 응징하고 그런 행동을 억제할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중국의 국력이 계속 강해지는 상황에서 이는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균형과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튼튼한 동맹과 우호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중국이 어느 정도는 미국의 개입을 묵인하고, 미국과 동맹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한다.

 

아시아 공영을 위한 연합을 만들자

미국이 동맹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은 하도 많이 나와서 하나 마나 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동맹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려면 많은 나라와 다양한 세력이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개별 국가들은 현행 체제가 완전히 파괴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의 질서를 유지하는 게 과연 무엇이 이득인지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원래 동맹이나 연합의 필요성은 같이 품을 들여 유지해온 질서가 깨졌을 때 더 두드러지는 법이다.

헨리 키신저는 19세기 유럽의 상황에서 정확히 이 문제를 읽어냈다. 키신저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중국의 부상을 아시아태평양 지역 정치지도자들만큼 시급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또 다른 우방인 유럽 각국에 역내 질서를 해치려는 중국의 위협을 적절히 알리고 전달하는 일이 미국에는 또 하나의 과제다. 중국의 경제력이 이미 커져서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과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당장 지난해 말 중국은 유럽연합(EU)과 단일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다가 막판에 극적으로 타결됐는데, 바이든 행정부는 대유럽 정책에 적잖은 부담을 안게 됐다.

여러 가지 제약을 고려하면 미국은 여러 세력과 유연하면서도 혁신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는 거대한 연합체를 구성하기보다는 사안별로 이해당사자를 규합해 연대하는 쪽이 낫다. 예를 들어 영국이 G-7에 인도, 호주, 한국을 포함한 D-10 협의체를 제안한 것이 좋은 예다. D-10이 꾸려진다면 가장 먼저 협의할 내용은 역시 무역, 기술, 공급망, 표준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중국의 영토 확장을 견제할 군사적 동맹도 필요하다. 지금은 이른바 4개국 연합(Quad)이란 이름 아래 호주, 인도, 일본, 미국이 함께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또한, 인프라 투자 부문은 인도와 일본이, 인권 문제에서는 역내 24개국이 함께 신장, 홍콩에서 중국 당국이 자행한 인권 탄압을 규탄하고 있다.

다양한 연합과 폭넓은 전략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앞서 언급한 대로 흔들리는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지역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을 강화하도록 의견을 모으는 일이다. 동시에 중국의 행위와 의도가 아시아 전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수행해야 했던 국가 전략 차원의 과제 가운데 최근 들어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200년 전 메테르니히와 캐슬레이는 위태롭던 체제를 우려하던 비관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들은 국가와 정치인을 비롯한 개인이 결국엔 어두운 야망을 품고 있어서 협력하지 못할 거라는 회의론과 냉소주의를 품고 있었지만, 상당히 유연하고 튼튼한 체제를 만들어냈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미국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동맹국, 나아가 유럽의 우방들에 지금 필요한 것도 200년 전 빈 체제를 구축하는 데 동원된 냉철한 현실 판단과 목표일지 모른다. 그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착실히 수행해나간다면 우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고, 그 혜택은 전 세계가 골고루 나눠 가지게 될 것이다. 전 세계 경제의 절반,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절반, 전 세계 핵무기 보유국의 절반이 이 지역에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평화는 곧 전 지구의 안전과 평화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