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채권, 유로존 부활의 열쇠 될까?
2020년 4월 4일  |  By:   |  경제, 세계, 칼럼  |  No Comment

1980년대 초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유명한 폴 볼커 연준의장은 201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유럽에는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인물이 나타나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좀처럼 보이질 않는군요.”

그리스에서 시작된 국가 부채 위기가 전 유럽을 휩쓸던 때였습니다. 볼커 전 의장은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비슷한 경제 위기가 유럽연합을 덮치자 볼커 전 의장의 일침이 다시 떠오릅니다.

볼커는 당시 유로 채권(euro bonds)을 둘러싼 논쟁을 바라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해밀턴을 떠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코로나채권(coronabonds)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맥락은 같은 논쟁이 재현됐습니다.

코로나채권은 유로화를 쓰는 19개 회원국(유로존)이 함께 지급을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해 팬데믹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를 살리는 데 필요한 긴급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입니다. 코로나채권을 발행하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코로나바이러스로 큰 타격을 입은 나라들이 경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상대적으로 싼 이자에 빌릴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독일을 비롯해 국가 재정이 견실한 나라들은 단독으로 채권을 발행할 때보다 더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야 합니다. 현재 사실상 이자를 내지 않고 돈을 빌릴 수 있는 독일 같은 나라들이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유럽의 이웃나라를 위해 높은 이자를 감수하며 돈을 융통할 수 있게 해준다면 말 그대로 어려울 때 간절히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셈이 됩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고 아름답지 않죠. 유로존 국가 가운데 9개 나라는 코로나채권에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반면 10개 회원국은 코로나채권에 찬성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예상대로 독일이 반대하는 편에 섰고, 반대하는 이들 가운데 가장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남유럽 국가들은 지금 상황에 불만이 큽니다.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이번주 독일 신문 곳곳에 전면 광고를 실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코로나채권에 반대하고 나선 네덜란드 정치인들을 지목하며 “기본적인 도덕도, 연대 의식도 없는 이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신문에 광고를 직접 실은 건 독일인들에게 2차대전 이후 독일의 전쟁 부채를 탕감해준 유럽의 결정을 상기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코로나채권을 둘러싸고 격화되는 논쟁을 지켜봤다면 아마 볼커 전 의장은 또다시 1790년대 해밀턴과 토마스 제퍼슨의 유명한 논쟁을 떠올렸을 겁니다. 해밀턴과 제퍼슨의 논쟁도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 참여한 13개 주정부가 진 전쟁 부채를 연방정부가 대신 상환해주자고 제안합니다. 조세 권한을 보유하고 강력한 재정정책을 집행하는 연방정부(중앙정부)를 염두에 둔 제안이었죠. 제퍼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퍼슨은 주정부 위에 군림하는 연방정부는 미국의 건국 이념에 맞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두 의견의 절충안이 채택됐고, 미국 연방정부는 주정부의 부채를 인수해 대신 갚는 형식으로 탕감해줬습니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국채를 발행했죠. 연방정부는 제퍼슨이 우려한 대로 실제로 계속 기능을 더해가며 비대해졌습니다. 1930년대 뉴딜 정책 이후의 연방정부를 봤다면 제퍼슨이 개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볼커는 유럽연합이 처한 난관의 어떤 점에서 해밀턴을 떠올렸던 걸까요? 1950년대 유럽석탄철강 공동체를 결성하면서 시작된 ‘하나의 유럽’을 향한 실험은 여러 이견이 있지만, 어쨌든 궁극적으로 유럽연합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목표로 합니다. 로마 조약에 명시된 “한없는 연합체에 가까운(ever closer union)”이란 표현에도 그러한 목표가 집약돼 있습니다. 유로화의 출범은 그래서 대단히 큰 진전이었습니다. 통화를 하나로 합쳤으니 결국은 은행과 자본시장, 재정정책을 통합해 미국 재무부처럼 유럽 재무부가 유럽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다음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알다시피 유럽과 미국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해밀턴의 구상은 주정부의 부채를 인수해서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연방정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연방정부에는 국채를 발행해 진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둘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민을 대표하는 하원과 각 주를 대표하는 상원이 연방 의회를 구성해 세제를 짜고 합의한 대로 세금을 거뒀죠.

게다가 미국 연방정부는 그 때부터는 재정적으로 곤란해진 주정부를 좀처럼 구제해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840년대에는 주정부가 잇달아 파산하도록 연방정부가 그냥 방치해둔 적도 있습니다. 재정 건정성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달은 주정부들은 너도나도 균형 예산 관련 조항을 만들어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정부의 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연방정부도 총수요를 관리하는 재정정책을 직접 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유로 채권과 코로나채권을 발행하자는 주장은 다른 맥락에서 나왔고, 채권의 형태도 명백히 달랐습니다. 즉 채권은 여전히 각 회원국 정부가 발행하고, 채권의 지급을 보증하는 것만 발행 회원국뿐 아니라 유로존의 여러 나라 정부가 함께 연대 보증하는 식으로 하자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채권을 발행하는데, 그 지급은 미국의 50개 주정부가 함께 보증하는 겁니다. 텍사스주가 그런 제도를 좋아할까요? 반대로 캘리포니아주는 텍사스주가 연대 보증인 자격으로 와서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재정지출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걸 참을 수 있을까요? 캘리포니아를 이탈리아로, 텍사스를 독일로 바꿔서 보면 지금 쟁점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일 겁니다.

유로존을 아우르는 채권을 발행하자는 아이디어는 구체적인 조건과 이름은 바뀌었지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을 하든지간에 해밀턴이 구상한 방안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그나마 가장 지지를 받는 방안이 신용도가 다른 두 가지 채권을 발행하자는 방안입니다. 먼저 상대적으로 안전한 채권(blue bonds)을 각 회원국이 GDP의 60%까지 발행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채권은 유로존 회원국들이 연대 보증을 서주는 만큼 부도율이 낮아 신용 등급 AAA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보증인이 더 적고 부도율이 높아 신용 등급도 낮은 더 위험한 채권(red bonds)을 발행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채권을 발행해 빌린 돈을 갚는 데 쓰일 세금은 여전히 각 회원국 정부와 의회가 각자 알아서 정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를 비롯한 이른바 검약국가(frugal states)들은 남유럽 정부와 의회가 자국민들에게 세금을 잘 안 걷고 결국 빚을 부유한 북유럽 국가들이 갚게 하려고 하지는 않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기 쉬운 상황인 거죠. 이를 막기 위해 검약국 정부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남유럽 정부의 조세 정책과 정부 지출에 간섭하기 시작할 겁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사이에 벌어진 가상의 신경전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거죠.

코로나채권을 둘러싼 논쟁은 유로존은 물론이고 유럽연합 전체를 갈라놓을 수도 있는 간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가상의 시나리오 두 개만 간단하게 살펴보죠.

먼저 검약국들이 채권의 연대보증을 서주는 걸 주저하다가 끝내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남유럽 국가에서는 어려울 때 나 몰라라 하는 이웃 나라와 유럽이라는 한지붕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폐쇄적 민족주의자와 포퓰리즘이 득세할 겁니다. 이탈리아 북부연맹을 이끄는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죠. 살비니는 노골적으로 유로를 버리고 유럽연합에서도 탈퇴하자며, 인색하고 거만한 유럽 나라들이 아니라도 중국을 비롯해 돈을 빌릴 수 있는 새로운 친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약국들이 코로나채권을 발행하는 데 합의해줬다고 가정해봅시다. 잘 되면 채권의 규모도 늘리고 좀 더 통일된 유럽의 재정정책도 시행할 수 있게 되겠죠.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서도 남유럽 국가들은 유럽연합의 간섭에 시달리게 되며, 검약국에서는 “왜 우리가 낸 세금을 게으른 남유럽 국가 빚 갚는 데 써야 하느냐”는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네덜란드나 독일에서 유로존에서, 유럽연합에서 탈퇴하자는 포퓰리즘이 득세할 여건이 만들어집니다.

어쨌든 지금 필요한 건 해밀턴이 230년 전에 구상했던 그런 채권이자, 그런 권한을 지닌 정부입니다. 유럽은 지금 단결해서 채권을 발행하고, 직접 세금을 거둬야 하며, 무엇보다 이 결정을 회원국(주정부) 단위가 아닌 유럽 차원(연방정부)에서 해야 합니다. 유럽 재부무, 유럽 입법부가 유럽연합 의회와 함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선 채권을 발행하는 일 등 시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이어 고용보험 등 각 회원국 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중앙에서 관리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책들을 하나씩 가져오면 됩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유럽연합을 떠받치는 조약들을 일일이 다 바꿔야 합니다. 조약의 문구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건 해밀턴과 제퍼슨이 논쟁을 벌이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당사자인 유럽 시민들의 생각이 될 겁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미합중국(United States)을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2020년의 유럽인들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죠. 그래서 볼커 전 의장이 지금 코로나채권을 둘러싼 논쟁을 봤더라도 아마 해밀턴 같은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유럽연합에 남은 선택지 가운데 좋은 카드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블룸버그, Andreas Kl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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