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실제 세상을 보지 못하는가
2019년 12월 13일  |  By:   |  과학  |  No Comment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짜 뉴스’와 정치적, 상업적 선전이 판치는 지금 우리 인간은 사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 비록 다소 무책임하게 들릴지 몰라도 – 적어도 ‘현실(reality)’과 ‘진화’에 대해 사람들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리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군요.

시각 분야의 선구적인 과학자였던 데이비드 마아(David Marr)는 1982년 자신의 책 “비전(Vision)”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각 시스템의 진화에 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시각적 세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이 힘든 작업을 시각 시스템이 서서히 발전시켜왔다는 점이다.” 아마 대부분 교과서는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수록 그 생명체는 먹이를 더 잘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포식자 등 생존을 위협하는 다른 요인도 더 잘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경쟁자를 따돌리고 자손을 번식하는 데도 유리했을 것입니다. 곧,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 능력은 환경에 대한 훌륭한 적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화는 이런 능력을 갖춘 개체를 선호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진화에 의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도록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혹은 감지하지 못하는 것에 어떤 장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화는 생명체가 세상을 점점 더 잘 감지하도록 만들었겠지요. 누가 여기에 반대할까요?

하지만 모든 철학적 논의가 그렇듯이 우리는 단어의 정의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먼저 ‘객관적’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현실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나의 관찰 결과가 다른 이의 관찰 결과와 동일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찰의 목적인 대상은 누가 관찰하느냐와 무관하게 그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대상이 ‘관찰자의 마음’에 존재한다면, 그 현실은 주관적일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 에이브러험 페이스에게 “당신은 정말 달이 내가 쳐다볼 때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요?”라고 한 질문이 종종 인용되지요. 만약 달이 객관적인 대상이라면, 누구도 달을 쳐다보지 않아도 달은 존재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 인간은 객관적 현실을 관찰하도록 진화했을까요? 객관적 현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먼저 물리학을 생각해봅시다. 뉴턴의 시대에 물리학자들은 행성과 포탄의 움직임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습니다. 열과 빛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중력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아마도 당황했을 겁니다. 100년이 지난 뒤, 우리는 전기와 자기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또 100년이 지난 뒤 우리는 원자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회전하는 구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빛은 전기와 자기의 신비한 조합이었습니다. 하지만 중력은 아직도 여전히 미지의 존재였습니다.

20세기, 우리는 이제 일상에 보이는 대상을 넘어, 양자장과 블랙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그 이론들에 등장하는 용어의 의미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일상의 경험 자체가 환상이라 생각합니다. 21세기 초, 어떤 물리학자들은 현실이 정보의 집합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곧, 우리는 현실을 관찰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위와 강, 식물과 동물,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도록 진화했습니다. 물리학은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만 다소 미묘합니다. 바로 물리학의 양자역학이나 고전역학에서 무엇을 독립된 대상(주변 환경과 분리되어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는 개체)으로 삼을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이 다양한 방식으로 덩어리질 수 있음을 보였지만, 그 덩어리의 경계를 정하는 방법이나 그 덩어리에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기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 구름이나 안개와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 어떤 대상을 그 환경과 명백하게 구분된 독립된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관찰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은 다른 인간들이며 이들은 오랜 시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독립된 개체입니다.

물론 우리는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감각은 실제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진화했다면 우리는 그 현실의 극히 일부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왜 바로 그 일부를 감지하는 것일까요?

이제 생물학으로 영역을 바꿔 ‘진화’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진화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가 ‘점점 더 객관적인 대상을 감지하도록’ 진보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곧,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다른 생명체들이 우리 인간보다 덜 객관적으로 세상을 볼 것임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논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조상들이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금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식물이나 곤충, 나무, 물고기들이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직 살아남았을까요? 지금 우리 인간이 가진 감각의 정확도가 진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라면, 다른 생명체들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실 많은 동물이 우리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감지합니다. 철새는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며, 박쥐는 초음파를 이용해 위치를 파악합니다. 개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와 맡을 수 없는 냄새를 맡습니다. 곧, 인간의 감각은 최고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장 진화된’ 생명체라는 것은 진화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정확히 같은 정도로 ‘진화’되었습니다. DNA 분석을 믿는다면, 오늘날의 모든 생명체는 40억 년 전 존재한 단세포의 후손입니다. 박테리아는 최소한의 감각과 인지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인간 만큼이나 진화된 존재입니다.

단세포에서 다세포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특정한 자신만의 환경에서 번성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며 자신만의 계보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수많은 생명체가 있습니다. 바닷속 깊은 곳, 물이 끓고 유황 성분이 많은 온천 속, 땅속 깊은 곳의 바위 틈새, 그리고 우리 내장 속 열악한 환경에 수많은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들에겐 왜 인간이 가진 감각 능력이 없을까요? 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폰 웩스쿨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생명체는 자신만의 움벨트(umwelt, 환경)를 가지고, 자신만의 감각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지난 500년 동안 기술을 발전시켜 인간의 움벨트를 극적으로 팽창시켰습니다. 하지만 진화가 우리에게 선사한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인간의 고유한 “움벨트”는 어떤 모습일까요?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회성입니다. 우리는 다른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하거나 괴로울지는 전적으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곧 가족, 동료, 부족, 국가와 같은 사회적 구조가 진화라는 힘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활동 또한 법, 정부, 단체, 종교, 돈과 같은 사회적 구조물에 의해 규정됩니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사회적 구조와 구조물은 가상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합니다. 만약 인간이 이를 관찰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사회적으로 구성된 이러한 가상의 존재를 지워봅시다. 그럼 바위와 강, 식물과 동물, 그리고 다른 인간이 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의미를 부여한 존재들입니다. 이 경계를 다시 지우면 남는 것은 원자, 양자장, 추상적 정보 등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그저 빛을 측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상을 보고 움직임을 보는 것이지 그저 정지화면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행동의 기회를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설사 그것이 순간적인 반사 반응이라 하더라도, 그 무언가를 환경에서 분리하여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이먼-채브리스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말해주듯,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경우 보지 못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진화가 우리에게 부여한 능력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입니다. 진화에 있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성공적인 번식에 유리한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매우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물과 기회, 위험, 잠재적인 도구, 그리고 먹을 수 있는 것을 관찰합니다. 우리는 지표면에서 천천히 이동했기에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산과 별을 보는 능력으로 충분했습니다.

보는 것이 곧 의미를 찾는 것이며, 의미를 찾는 것이 곧 번식의 유리함(진화적 용어로는 ‘적합성’이라고 합니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에서 관찰자에 무관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관찰 결과에 의미를 더합니다. 의미는 진화가 준 선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물이 그러하듯, 의미에도 비용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관심입니다.

진화에 있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본능적으로 수집한 생명체들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했던 생명체들을 늘 이겨왔습니다. 호프만은 이를 바탕으로 지각의 ‘인터페이스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정보를 넣고 얻는 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과 그 결과와 관련된, 실제 세상의 단순한 버전만을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내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듯이 이 세상 또한 양자장 이론 등의 원리를 통해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를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도록 진화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진화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IAI,Chris Fie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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