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거인단 제도에 숨은 어두운 그림자: 인종차별
2019년 11월 23일  |  By:   |  세계, 정치, 칼럼  |  No Comment

뉴욕대학교 법과대학 브레넌 정의센터의 펠로우이자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인 윌프레드 코드링턴 변호사가 애틀란틱에 쓴 칼럼입니다.


미국의 정치 제도는 지금 피부색에 상관없이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지난 2013년 대법원이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일부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투표권법 가운데 주 정부가 투표와 관련된 주의 법률을 바꾸려면 반드시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5조의 조항을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해당 조항은 벌써 5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조항인데, 이제는 (특히 인종에 따라) 투표를 가로막고 억압하는 기제가 없으므로, 연방 정부가 주 정부의 자치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취지에 다수의 대법관(5:4)이 손을 들어준 겁니다.

‘어디 감히 흑인이 투표할 꿈을 꾸냐’는 논리를 내세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고 투표권을 강제로 빼앗는 일이 빈번하던 1950년대와 지금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다양한 방법으로 투표를 방해하는 장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장치는 특히 특정 인종이나 집단의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처음의 취지를 잃지 않았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적용하는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이라는 매우 독특한 제도입니다.

2013년 대법원은 텍사스주 셸비 카운티(Shelby County)가 제기한 위헌 소송에서 주 정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당시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은 “특정 인종을 부당하게 우대하거나 반대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정치 과정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여기서 함정은 바로 미국의 선거 제도가 특정 인종(흑인)을 부당하게 억압해온 제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미국 선거에서 백인의 표는 과대대표돼 왔습니다. 흑인을 재산으로 취급하며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기 전은 말할 것도 없고, 인두세(poll taxes)나 사진이 있는 신분증이 있어야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한 법(voter-ID laws) 등 투표하는 절차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 법들은 예외 없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의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고안됐고, 그 목적대로 흑인과 유색인종의 목소리를 줄였습니다.

보수주의 사상가로 보수 성향의 잡지 <내셔널 리뷰>를 창간한 윌리엄 버클리(William F. Buckley)가 썼던 칼럼을 보면 그 의도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백인들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특히 백인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는 백인의 특권을 인정해서 가중치를 줘 목소리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유는 자명하다. 백인이 더 우월한 인종(the advanced race)이기 때문이다. – 버클리의 칼럼 “남부여 영원하라(Why the South Must Prevail)” 중

물론 이렇게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낸 경우는 예외일 뿐 특정 인종을 차별하려는 의도가 법안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법안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는 유색인종의 투표를 억압했다는 데 이론을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많은 평론가는 선거인단 제도를 처음 만들 때 인종이나 노예제의 역사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인종에 따라 표에 가중치를 매겨야 했던 기득권 세력이 고안해낸 제도가 선거인단 제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인종에 따른 가중치가 전부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다른 요인도 많았죠.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부패나 족벌주의(cronyism)에 물들거나 분열을 조장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견제해야 했습니다. 대통령은 연방주의, 견제와 균형 등 헌법의 가치를 수호할 때만 권력을 위임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했죠. 그래서 만든 견제 장치 가운데 하나가 선거인단 제도였습니다.

사실 건국 초기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회의에 각 주를 대표해 모인 대의원들이 연방을 대표하는 대통령 제도의 개념과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대통령의 의무와 권한, 권력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았죠. 대신 어떻게 대통령을 뽑을지를 두고는 각 주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꽤 치열한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전체 후보를 대상으로 투표를 해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가 당선되는 일반 투표(popular vote)는 ‘지나친 민주주의(too much democracy)’라는 이유로 부결됐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정치 지도자를 직접 뽑아야 한다는, 지금 기준에서는 보편적인 상식이 당시 헌법회의에 모인 대의원들에게는 여러모로 가당치 않았던 겁니다.

헌법회의에 모인 대의원 가운데 남부 주에서 온 대의원들은 전부 다 노예를 ‘소유’한 백인 남자였습니다. 이들은 유권자가 후보를 직접 뽑는 방식을 반드시 저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도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운영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이들은 직접 선거와 일반 투표에 노골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다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마저 이런 현실 앞에서는 노예를 거느린 자신의 처지와 남부 주 출신 백인의 주장을 묵살하지 못했죠. 훗날 4대 대통령(임기 1809~1817년)이 될 매디슨은 헌법회의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의견이 대체로 가장 옳다”고 말하면서도 남부 주의 견해를 반영해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직접 후보를 선출하는 제도를 섣불리 도입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많다. 투표권과 참정권에 대한 논의는 남부보다 북부 주에서 훨씬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 특히 많은 흑인 노예가 있는 남부에서는 흑인들의 투표권에 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직접 투표 대신 선거인(electors)을 뽑아 간접 투표를 하면 이런 어려움 없이 책임 있는 선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북부와 남부의 인구구성, 유권자 지형을 살펴보면 남부 출신 대의원들이 왜 이 문제에 결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북부와 남부 주의 전체 인구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남부에 사는 사람 가운데 약 1/3은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남부에서는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정치적인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전체가 일반 투표로 후보에게 직접 표를 던져 대통령을 뽑는다면 당연히 북부 주가 선호하는 후보가 당선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 이전에 입법부의 의석을 어떻게 배분할지 정하는 단계에서 먼저 불거집니다. 노예제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산업이 주를 이루던 북부 주들은 남부에서는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므로, 이들을 인구를 계산하는 데 포함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부 주의 주장대로라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인데 왜 의석을 배분할 때만 사람으로 취급하려 하느냐는 거였죠. 남부 주들은 그렇게 되면 북부 주에 의석수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타협안이 노예를 완전한 사람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재산도 아닌 3/5명으로 계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조항은 이렇습니다.

하원 의석은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해 배분한다. 각 주의 인구는 계약 노무자를 포함한 자유인(free persons)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indians)을 빼고, 그리고 나머지 사람의 3/5을 더해 계산한다.

여기서 ‘나머지 사람’이란 당연히 노예들이었습니다. 미국 전체 노예의 93%가 남부 5개 주에 몰려 있었습니다. 타협안의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은 당연히 남부의 노예주들이었습니다. 노예를 인구로 계산하지 않았을 때보다 의석을 42%나 더 많이 받았죠. 입법부 의석을 배분할 때 인구 계산법을 정하기까지는 적잖은 진통이 있었지만, 한 번 정해놓은 계산법을 대통령 선거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직접 선거 대신 대통령도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정됐습니다. (선거인단 숫자를 정할 때 마찬가지로 노예는 3/5명으로 계산됐습니다)

 

그러니까 선거인단 제도는 처음부터 대통령을 뽑을 때 피부색에 따라 표의 가치를 다르게 계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 위에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거나 뮤지컬 <해밀턴>의 팬이라면 선거인단 제도가 처음으로 명확한 한계를 드러냈던 대선을 잘 알 겁니다. 바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애런 버(Aaron Burr)가 선거인단으로부터 같은 수의 표를 받은 1800년 대선이었습니다. 버는 같은 주 출신이던 연방주의자 해밀턴을 견제하기 위해 출마했는데, 선거인단으로부터 같은 표를 받자 원칙대로 하원이 선거의 승자를 결정했고,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었죠.

1800년 대선은 사실 선거인단 제도가 큰 영향력을 미친 선거였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남부에 있는 노예에게 한 명당 3/5표를 준 규정이 선거의 향배를 결정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즉, 노예를 거느린 남부 출신 반(反)연방주의자 제퍼슨이 재선을 노리던 존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을 꺾을 수 있던 건 다분히 남부의 노예 주가 노예 한 명당 3/5표만큼 선거인단을 더 인정받은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노예제 폐지론자(abolitionist)였던 애덤스 대통령이 실제로는 의사를 반영하지도 않은 노예 몫의 선거인단의 외면을 받으면서 선거에 진 거죠. 예일대학교 법과대학의 아킬 리드 아마르 교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노예의 표를 등에 업고 백악관에 입성했다.

이후 1860년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될 때까지 백악관의 주인은 줄곧 노예제를 인정하는 남부 주와 북부 출신이지만 노예제에 찬성하던 이들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이어 1803년에 제퍼슨과 버 사건이 또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수정헌법 12조가 제정됩니다. 60년이 지나 수정헌법 13조가 제정되면서 미국에서 노예제가 금지됐습니다. 이제 남부 주들은 투표권도 주지 않고 강제로 빼앗은 목소리를 왜곡해 대변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남부의 노예 주인들이 부당하게 누린 혜택이 사라진 거죠. 그러나 큰 줄기의 제도가 바뀌어도 인종에 따라 투표권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관행은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18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새뮤얼 틸든(Samuel Tilden) 후보는 총득표수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결과가 뒤집혔습니다. 의원들과 대법관들이 모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인정하기로 했고, 공화당의 러더포드 헤이예스(Rutherford B. Hayes) 후보가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1877년 타협(Compromise of 1877)의 일환으로, 연방정부는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 철폐를 이행하는지 단속하고 흑인의 투표권을 보호하기 위해 남부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합니다.

남북전쟁 이후 짧게 나타났던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는 1877년 타협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 전쟁 이전에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 주의 속성이 다시 제도에 반영돼, 짐 크로우(Jim Crow) 법 등 유색인종에 대한 분리 정책과 차별이 부활합니다. 주둔군이 사라지자 백인 우월주의가 공공연히 발흥했고, 흑인 유권자들은 사실상 투표권을 박탈당합니다. 흑인들은 미국 건국 이후 80년 동안은 노예제하에서, 노예제가 철폐된 뒤에도 80년을 더 유색인종에 대한 노골적인 분리 정책과 차별 속에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거세당한 채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1876년 선거에서 선거인단이 일반투표 결과를 뒤집어버린 것이 1877년 타협을 낳았고, 1877년 타협이 재건 시대를 미완으로 종결시키면서 미국의 헌법과 제도는 노예제를 완전히 뿌리 뽑는 데 실패한 겁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분리정책은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될 때까지 계속됐고, 유색인종의 투표권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못하도록 한 투표권법도 1965년에야 제정됐습니다.

어쨌든 선거인단 제도는 처음 생겨난 뒤 두 세기 넘는 긴 시간 남부 백인의 목소리에는 마이크를 켜주고, 유색인종의 목소리에는 음소거 버튼을 누르는 원래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선거인단 제도가 흑인과 유색인종이 선거에서 행사하는 표를 희석하고, 이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억압해온 겁니다. 지금도 남부에 상대적으로 많은 흑인이 모여 사는데, 대통령을 뽑을 때도 주별로 표를 집계한 뒤 선거인단이 승자에게 표를 몰아주기 때문에 흑인 유권자의 표는 사표가 되는 비중이 다른 인종보다 훨씬 높습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흑인의 비율이 25%를 넘는 주가 6개 있습니다. 이 가운데 5개 주가, 정확히 말하면 5개 주의 선거인단이 트럼프 후보를 찍었습니다. 6개 주 가운데 3개 주의 선거인단은 지난 40년간 민주당 후보를 찍은 적이 없습니다. 일반 투표로 대통령을 뽑으면 대다수 흑인 유권자의 표가 민주당 후보에게 갔을 수 있지만,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흑인 유권자의 목소리는 사장된 거죠. 투표권법이 제정된 뒤에도 공공연히 흑인의 표를 지워버리는 법을 내세운 백인들의 소위 남부 공략법(the southern strategy)이 의도한 대로 먹힌 겁니다. “남부여 영원하라”를 외치던 버클리가 흐뭇하게 볼 만한 일이죠.

 

선거인단 제도를 지지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드는 근거가 바로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정치인들이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만 공을 들이지 않고) 작은 주를 구석구석 더 누비며 더 다양한 유권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해도, 선거인단 제도하에서 묵살되던 목소리에 발언권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거인단 제도를 철폐하는 거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어차피 미국인 4명 중 3명은 양대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선거운동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지역에 삽니다. 선거인단 제도가 단순히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승리하는 일반 투표 제도로 대체되더라도 정치인들은 여전히 유권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겁니다. 오히려 ‘이 지역은 어차피 사표니까 버려도 된다’는 전략을 버리고, 모든 유권자의 표를 동등하게 계산해 선거운동을 할 겁니다.

게다가 정치인이 모든 유권자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들어야 하므로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도덕적으로도 결함투성인 주장입니다. 모두의 표를 동등하게 반영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민주주의 선거에서 전체 의견을 가늠하는 데 일부 집단의 소수표를 확대해 적용하자는 주장은 전제정을 부르는 것으로 배척되어야 마땅합니다. 인위적으로 유권자의 푯값을 달리 계산하는 선거제도와 그런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체제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묘사하고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미국 헌법은 꾸준히 모든 유권자의 표를 동등하게 계산하는 방향으로 개정돼 왔습니다. 만약에 대선 후보가 흑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므로 흑인의 표가 가중치를 주는 제도를 만들자고 하면, 다른 인종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흑인도 여기에 반대할 겁니다. 부당한 특권은 민주주의를 좀먹기 때문이죠. 위의 주장에서 ‘흑인’을 ‘백인’으로 바꾸면 200년 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유지되고 있는 현행 선거인단 제도가 됩니다. 이걸 계속 유지하는 게 옳을까요?

지난 20년간 치른 대선 가운데 전체 득표에서는 졌지만, 선거인단의 표를 더 많이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 두 명 있습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2000년 조지 W. 부시) 단지 다수 유권자의 뜻이 묵살돼서가 아니라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미국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 어려운 몇 안 되는 격전주에만 모든 자원을 쏟아붓도록 함으로써 선거 과정을 왜곡한 것도 선거인단 제도의 대표적인 폐해입니다. 여기에 선거인단 제도는 태생부터 백인의 목소리를 과대대표하고 흑인의 목소리를 말살하고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며, 그 목적을 지금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논쟁할 때마다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인종차별을 바탕으로 한 특권의 어두운 역사가 탄생시킨 선거인단 제도는 21세기 민주주의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원칙에 기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피부색에 상관없이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하는 정치 제도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손쉬운 개혁은 선거인단 제도와 그 뿌리를 헌법으로 금지하는 일입니다.

(애틀란틱, Wilfred Codrington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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