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성향 부동층’이란 허상
2019년 10월 16일  |  By:   |  세계, 정치  |  No Comment

“지지 정당이 없는 부동층(浮動層) 공략이 열쇠”

“중도 성향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쪽이 이긴다”

“(미국) 민주당이 이기는 법? 우클릭!”

이런 부류의 주장이나 기사 제목 많이 보셨을 겁니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요즘 선거의 구도나 유권자 지형, 정치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잘못된 분석’입니다. 이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분은 이 글을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글은 아직도 부동층 공략에 선거의 승패가 달렸다고 믿는 분들에게 상황을 달리 바라볼 만한 관점을 제시해드리기 위한 글입니다.

리 드루트만이 파이브서티에잇에 쓴 칼럼 원문에는 엘라 케제가 작업한 도표와 그래픽이 함께 있습니다. 미국 유권자와 미국 정치 상황을 토대로 분석한 글이지만, 우리나라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칼럼의 요지를 추려 정리했습니다.


양극단의 진영 논리에 진절머리가 난 유권자들이 대거 ‘지지정당 없는’ 중도 성향의 부동층을 이루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정책을 내세우는 후보를 기다린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은 한마디로 그럴듯해 보입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기사를 (제목과 머리기사 정도만) 보면 더 그렇죠.

올해 초 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미국인 가운데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한 이들이 40%를 넘었고, 자신의 정치 성향이 중도(moderate)라고 답한 응답자가 40%에 육박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진보든 보수든,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한쪽을 지지하는 것은 이제는 쿨하지 않은 것이 됐다는 분석이 나올 법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실제 정치적 역학관계의 면면을 살펴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를 외면한 채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중도 성향 부동층이니 한쪽 정파에 치우친 메시지를 삼가자”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주장입니다.

 

당장 ‘moderate’, ‘independent’, ‘ undecided’ 같은 단어가 뜻하는 바도 맥락에 따라 조금씩, 때로는 적잖이 차이가 납니다. 단순히 ‘중도, (지지정당 없는) 독립, 부동층’으로 옮겨 이해하고 말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이렇게 답한 유권자를 분석해 보면 진정한 의미의 ‘중도 성향 유권자’가 아닌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이념적으로도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특정 시점에 특정 사안을 놓고 던진 질문을 토대로 중도로 뭉뚱그려 분류된 탓도 있지만, 어쨌든 중도 성향 유권자로 분류된 이들이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곤 합니다.

‘중도 성향’이 얼마나 허구인지, 우선 위에서 소개한 moderate, independent, undecided 유권자부터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 실제 데이터를 토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민주주의 펀드의 유권자 연구 데이터를 참고로 했습니다.

전체 유권자의 절반 가까운 사람이 실제로 정말 중도 성향 부동층이라면 다음 세 가지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유권자들이 상당 부분 겹쳐야 합니다.

  1. 스스로 중도 성향(moderate)이라고 답한 유권자 – 32.8%
  2. (조금이라도 선호하는 정당이 있으면 골라 달라는 질문에도)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한 유권자(independent) – 14.9%
  3.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후보 사이에서 누구를 뽑을지 아직 정하지 못한 (undecided) 유권자 – 11.2%

결과는? 세 가지에 모두 해당하는 응답자는 전체의 2.4%에 불과합니다. 서로 완전히 분리된 집단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반대로 상당히 유사한 집단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작은 숫자입니다.

 

유권자들의 성향을 실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바탕으로 분류해봤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제 정책(시장에 맡기자 vs 시장실패를 적극적으로 수정하자), 이민에 대한 찬반 두 가지에 대한 답변을 분석해봤습니다.

답변이 다양하게 나온 가운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진보적인 정책(정부가 시장이 만든 불평등을 개선해야 & 이민자를 더 받아들여야)에 동의했고,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정책(시장에 맡겨야 & 이민자를 더 받아들이는 데 반대)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렇다면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한 이들의 답은? 어느 쪽이 많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습니다. 민주당 지지자들과 의견이 같은 사람도, 공화당 지지자들과 의견이 같은 사람도 있었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한 이들에게는 어필할 만한 경제 정책, 이민 정책의 기조를 정하기 무척 어렵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무당파층과 달리 스스로 중도 성향(moderate)이라고 답한 이들의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과 일부 겹쳤다는 점입니다. 이는 다른 것보다도 정치 성향을 표현하는 단어가 사용된 역사 탓으로 보입니다. 즉 공화당은 오랫동안 스스로 ‘보수(conservative)’라는 꼬리표를 자랑스레 붙여온 반면, 자유 혹은 진보를 뜻하는 ‘liberal’이라는 표현에 부담을 느낀 민주당이 한동안 선호하던 표현이 중도를 뜻하는 ‘moderate’이었습니다. 진보적, 개혁적 성향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민주당 내에서 다시 박수받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역자 주: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나 진보가 정치적 색채를 희석하려 할 때 ‘개혁’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여론조사만 하면 중도 성향 유권자가 항상 실제보다 더 많은 것처럼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형적인 설문지의 문항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보통 응답자의 정치 성향을 묻는 질문은 이런 식일 겁니다.

당신의 정치 성향을 가장 알맞게 표현하는 단어를 골라주세요. (진보, 중도, 보수)

진보나 보수를 자처할 만큼 정치 성향이 뚜렷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죠. 그렇다고 정치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 모두 중도 성향인 건 아니지만, 문제는 두 선택지를 빼고 나면 설문지에 남는 항목이 중도 하나밖에 없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어디를 가든 너무 튀지 않는 ‘중도’는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이기도 하죠.

정치학자 도널드 킨더와 네이선 칼뫼는 지난 50년간 진행한 정치 관련 설문조사를 분석한 결과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도 성향 유권자는 대체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적인 사람, 합리적인 유권자처럼 보인다. 실은 어떤 사안을 잘 모르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좋은지 싫은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경우에 ‘이도 저도 아니고,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줄 수 있는 이름표가 ‘중도’인 것이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브룩만이 중도 성향 유권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정책을 선호할지 분석하는 데 스스로 ‘중도’라고 지칭한 이들을 분석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중도 성향 유권자를 공략하는 데 선거의 승패가 달렸다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전문가들에게 이렇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면 됩니다.

“중도 성향 유권자, 좋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중도 성향 유권자가 어떤 유권자를 말하는 건가요? 그것부터 명확히 밝히고 나서 설명을 해주셔야죠.”

앞서 살펴봤듯이 지지정당 없는 유권자를 하나로 뭉뚱그려 사고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집단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층(undecided) 유권자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묶어낼 수 있는 한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은 없습니다. 당연히 이들을 위한 맞춤형 정책을 짜내기도 어렵고, 이들에게 압도적인 표를 얻어 결정적으로 선거의 향배를 바꾸기도 탁상공론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지지정당이나 지지 후보가 없다고 답하는 유권자들은 보통 정치인의 발언이나 정책에 관심이 덜합니다. 선거 막판에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변수에 따라 표심이 움직이는데, 이를 예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파이브서티에잇, Lee Dru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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