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중립성에 대한 현재의 논의가 소모적인 이유
정치인들과 미디어가 함께 쫓고 있는 환상이 있습니다. 1996년의 이른바 통신품위법(Communications Decency Act)의 한 조항과 관련된 환상이죠. CDA 230으로 알려진 해당 조항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부터 유튜브나 레딧에 이르는 인기 플랫폼들이 사용자의 게시물로 인해 고소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조항입니다. 이같은 “중립성”의 개념은 일부 정치인들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공화당 소속의 텍사스 주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는 이 법이 “중립적인 공론의 장”으로 기능하는 사이트들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다른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인 조시 할리 역시 “정치적인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플랫폼”만이 법조항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립적이지 않은” 플랫폼들은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해당 법조항의 내용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내용이라고 해도 그로 인한 결과를 좋아할 이는 없을 겁니다. CDA 230은 중립성에 대한 조항이 아닙니다. 플랫폼들로 하여금 “공격적인” 유저 콘텐츠를 제재하고 삭제하도록 독려하는 조항이죠. 8chan과 같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플랫폼이 될지, 핀터레스트처럼 규제하는 사이트가 될지는 플랫폼 운영자와 유저들의 몫으로 남겨두었죠. 만일 플랫폼이 면책특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콘텐츠 정책을 시행할 수 없었다면 오늘날의 통신은 1965년과 같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NBC와 같은 큰 기업이 신중하게 생산해낸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통신사가 제공하는 전화 서비스를 통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겠지만, 그 외의 옵션은 거의 없겠죠. 콘텐츠 생산자와 통신 서비스 제공자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역사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 적용하려는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라면 중립을 지켜라”라는 주장으로 이어진 겁니다.
물론 이같은 중립성에 대한 요구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미국 대법원이 “현대의 공공 광장”이라 칭하기도 한 대형 플랫폼들이 정치적인 기준에 따라 특정인들의 목소리를 불공정하게 억누를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나온 요구죠. 공화당원들만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흑인, 무슬림 활동가들은 물론 전세계 인권 단체들도 비슷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구글에서 수 년간 일했고, 구글의 게시물 삭제 정책이 편향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사람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플랫폼들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법을 통해 플랫폼들이 그 모든 우려를 해소하도록 하는 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플랫폼 유저나 정책 결정자들이 실제로는 플랫폼에 더 많은 콘텐츠를 내리도록 요구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죠.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게시물들도 그 요구에 포함됩니다. 현행 미국법 상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총기 난사 현장의 영상이나 낸시 펠로시 합성 동영상의 게시는 모두 불법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이유로, 또는 정책을 근거로 플랫폼이 그러한 콘텐츠를 금지할 수 있겠지만, 법적인 근거는 없죠. 플랫폼이 가치를 근거로 이 같은 게시물을 규제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은 특정한 가치를 선택하고 적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치라는 것은 말 자체로 중립적일 수가 없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중립성 정책이 불충분한 플랫폼이 발행되는 모든 콘텐츠에 법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겁니다. 인터넷 플랫폼에 워싱턴포스트가 받는 것과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플랫폼은 모든 게시물을 대중에 공개하기 전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유저들은 플랫폼 소속의 변호사가 고양이 동영상이나 정치적 견해가 법에 저촉될 소지가 없는지를 검토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변호사들이 아주 작은 법적 논쟁의 소지라도 발견한다면 게시물은 올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CDA 230을 만든 입안자들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양한 인터넷의 중개자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출판인 역할과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 중 하나를 양자택일하지 않고 각자의 정책을 수립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죠.
대부분의 경우 면책특권을 누림으로서 플랫폼들은 유저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할 수 있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콘텐츠도 지워야 하는 압박과 문제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런 면책특권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유저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시물을 올릴 경우에 콘텐츠 중재가 가능해지는 것이기도 하죠. 그러한 특권이 없이는 기업이 중재에 나섰다가도 유저의 발언에 책임을 지는 에디터나 출판자로 취급받게 될테니까요.
1995년 프로디지(Prodigy)라는 플랫폼이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당시 법원은 프로디지가 콘텐츠 관련 규정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유저의 게시물에 편집 책임이 있다며 1억 달러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을 받아들였습니다. 의회가 CDA 230을 입안한 것은 바로 이 결정을 뒤집고 중재를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법안은 또한 플랫폼이 법적 책임 없이 “부적절한” 게시물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1996년에 의회가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플랫폼이 중립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유저들의 발언을 중재할 수 있도록 허용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식의 규칙은 의미가 명확치 않습니다. “중립적인 중재”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자신의 도덕에 너무나 큰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중립적인 규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립적 중재” 규정을 시행할 주체는 연방통신위원회 같은 규제 기관이 될텐데, 이는 헌법 제 1 수정조항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법을 시행하려면 정부가 나서서 인터넷 상의 “합법적 발언”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를 결정할 수 밖에 없죠. 그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플랫폼의 파워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플랫폼은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단순히 CDA 230을 폐지하고 “중립성” 규칙을 새로 도입하는 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현재의 비생산적인 대화를 중단하고 새로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플랫폼들이 어떤 콘텐츠를 삭제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게 문제라면 진정한 투명성을 요구하고, 게시물이 삭제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 장치를 요구해야 합니다. 소수의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정보의 흐름을 독점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경쟁을 장려하기 위한 법안을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발언할 수 있는 플랫폼이 여러 개라면 한 플랫폼의 규제 정책이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있겠죠.
불법적인 콘텐츠가 문제라면, 의회가 이에 대한 규제를 조정할 수 있는 방안이 많습니다. 유저들이 불쾌하고 부적절하지만 합법적인 콘텐츠를 보게 되는 것이 문제라면,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에게 보이는 콘텐츠에 대한 통제권을 더 주면 됩니다. CDA 230의 입안자들이 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이고, 이는 법안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있는 법의 취지를 잘 살리기만 해도, 현재 우리가 우려하는 많은 것들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중립성”에 대한 소모적인 논의를 멈추고, 갖고 있는 법을 잘 들여다 보면서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워싱턴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