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노아 하라리: 자유라는 신화(2/2)
물론 이는 새로운 조언이 아닙니다. 고대의 철학자와 성자들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시대나 부처, 공자의 시대에는 당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해도, 여전히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정부와 기업은 당신을 해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게 된다면, 이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곧 그것이 제품이든 정치인이든 당신에게 팔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약점을 아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약점은 그들에게 당신을 해킹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안내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해킹은 코드 상의 오류를 이용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해킹은 인간이 가진 공포, 혐오, 편견, 그리고 욕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해커들은 공포나 혐오를 그저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면 그 감정을 적절히 자극해 무척 쉽게 이를 더 큰 공포로 키워낼 수 있습니다.
순전한 노력으로 자기자신을 잘 알기 어렵다면, 해커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이해하고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에서 백신 프로그램이 바이러스를 막아내듯 우리에게도 뇌를 위한 백신 프로그램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인공지능 비서는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유쾌한 고양이 비디오든, 짜증나는 트럼프 이야기든간에 – 파악해 당신이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정말 조종 가능한 동물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의견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정치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난 30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은 가능한한 많은 개인이 가능한한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좇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정치적인 이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꿈을 이루게 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순간도 동시에 눈앞에 와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바로 그 기술에 의해 정부와 기업은 사람들의 꿈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꿈이 진정한 나 자신의 꿈인지를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발견이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그 욕망을 실현할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간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이 생각과 감정, 욕망이 진정한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주의깊게 지켜보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왜 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묻게 된다면 어떨까요?
일단 자신의 생각과 욕망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우리는 이에 덜 얽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 보고 자신의 욕망이 새상과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개체와 다른 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곧, 자신은 독립된 존재이며 따라서 나머지 세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뿐더러, 자신의 변덕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게 되어, 자신이 이 우주에서 가능한 모든 욕망 중에 바로 그 욕망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다른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하고 바꾸도록 노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덕에 기반해 전쟁을 일으키고, 숲을 태웠으며, 생태계를 파괴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욕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그 욕망을 덜 추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나머지 세상과 더 연결된 느낌을 가질 수 있게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자유의지” 개념을 버리게될 경우 감정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막다른 골목에 갇혀 멸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 개념에 대한 포기는 두 가지 반대되는 효과를 불러옵니다. 첫째, 우리를 나머지 세상과 더 강력하게 연결하며, 이웃과 주변 환경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이와 대화할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며, 이때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말할 기회만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옆으로 제쳐둘 때 우리는 갑자기 다른 이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 “자유의지”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심오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욕망에 매달리는 사람은 자신을 더 잘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야, 그저 뇌의 생화학적 변화일 뿐이야!”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인류 각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가장 힘들고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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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한 의심이나 인간 본성에의 탐험은 아주 오래된 주제입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런 주제를 두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이제 모든 것을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 공학과 정치에서 다뤄야 할 실용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던대로 이 문제를 천천히 생각하는 동안 – 그들은 한 주제로 어떤 결론 없이도 3천 년을 논쟁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 공학자들은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급한 이들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을 해킹할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유권자의 선택이 최선이다” 혹은 “고객은 언제나 옳다”와 같은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이 해킹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 당신의 지지가 정부의 조종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 당신의 편도(amygdala)가 푸틴을 위해 일하고 있고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 알고리듬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을 당신이 깨닫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대개 이런 질문을 여전히 피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탐험하기보다 더 오래된 환상이 제공하는 피난처를 찾아 숨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체공학의 도전에 응전하기보다 자유주의보다도 더 과학적 현실과 거리가 먼 종교적, 민족적 환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적 모델을 찾는 대신 20세기 혹은 더 오래된 사상의 찌꺼기를 다시 모으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억 속 환상에 젖어있는 나라에서는 성경의 진실성이나 민족의 신성함(특히 당신이 나처럼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면)에 대한 논쟁을 보게 됩니다. 학자로써 이는 정말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은 볼테르의 시대에나 의미 있는 학문이었고, 민족주의는 20세기 최신 사조였습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심각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공지능과 셍체공학은 진화 과정 자체를 바꾸고 있으며, 이 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십 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두 가지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합니다. 먼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더 인간적인 정부를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장 제한을 덜 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21세기의 과학적 진실 및 기술의 진보와 일관성을 지니는 새로운 정치적 시스템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신인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여신 테티스를 두고 싸웠습니다. 하지만 테티스가 그의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지자 모두 테티스를 포기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기에 그들과 경쟁하게 될 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테티스는 인간인 펠레우스 왕과 짝지어졌고, 아킬레스를 낳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손이 더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 신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다. 권력을 영원히 가지려는 지배자는 자신을 밀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탄생을, 설사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해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디언, Yuval Noah Har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