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이키의 새 광고, 캐퍼닉의 메시지는 오히려 지워졌다?
2018년 9월 17일  |  By:   |  세계, 스포츠, 정치, 칼럼  |  No Comment

나이키의 콜린 캐퍼닉 광고는 이미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광고 영상 공개 수 일만에 온라인 판매가 31% 늘었죠. 캐퍼닉을 영웅적인 민권 운동가로 보는 진보 진영에서는 나이키의 대담한 행보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나이키 불매 운동과 나이키 제품 불태우기,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우파 인사들의 비난에 따른 우려도 있었지만, 매출은 나이키의 사업적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한 듯 합니다.

광고가 공개되기 하루 전, 나이키는 “신념을 가져라. 그것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의미일지라도(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캐퍼닉의 얼굴 사진을 먼저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다음 날 풀영상이 공개되자, 나이키가 얼마나 이 주제를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는지가 명확해졌습니다.

이번 나이키 캠페인의 메시지는 개인적, 구조적인 장애물이 있더라도 모두가 큰 꿈을 가져야 하며, 사상 최고의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상 속에는 세레나 윌리엄스, 메건 라피노, 르브론 제임스와 같이 캐퍼닉 지지 의사를 밝혔던 스타 선수들과 함께, 두 다리 없이 태어난 레슬링 선수 아이사이아 버드, 어릴 때 왼손을 잃은 미식 축구 선수 섀컴 그리핀, 학교 미식 축구팀의 스타 라인배커와 홈커밍퀸이라는 타이틀을 모두 가진 10대 여성 알리샤 울콧, 가나 난민캠프에서 태어나 16세에 캐나다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가 된 알폰소 데이비스 등 장애나 편견을 극복한 이들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빠르게 이어지는 스포츠 영상 콜라주 속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번 캠페인의 주인공인 콜린 캐퍼닉입니다. 국가 연주 중 경찰 폭력에 대한 항의 의사를 표출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는 검정 터틀넥 스웨터와 카멜색 코트를 입은 차림으로 밤거리를 거닐며 나레이션을 담당할 뿐입니다. 그가 경기장에서 했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는 장면은 물론이고, 그가 겪은 고초의 핵심 주제인 경찰 폭력이나 인종차별에 대한 암시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이키가 티저 사진을 통해 암시한 급진적인 선언은 정작 영상에 담기지 않았습니다. 캐퍼닉의 스타덤을 활용하면서도, 그가 던진 메시지와 직접적으로 얽히는 것은 피하려는 모습입니다.

“신념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이토록 소심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전부도 아닙니다. 불리한 신체 조건, 가난, 젠더 규범,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주의적 폭력과 경기장에서의 상대를 한데 묶어버리면, 이 모든 시련의 구체성은 사라지고 납작해집니다. 이 모든 문제가 운동 선수 개개인이 노력과 의지로 이겨내야 할 무언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스포츠 의류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최고가 되자”는 흔한 메시지가 나이키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이용하려는 바로 그 구조적 불의와 결합되면 곤란합니다. 제도적인 불평등은 한 사람의 탁월한 성취로 완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리한 조건을 뚫고 성공한 천재가 오히려 제도적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우파들이 캐퍼닉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부정하는 근거로 그가 돈 많은 유명인임을 끌고 들어오 듯 말이죠.) 캐퍼닉이 주도한 것과 같은 사회 운동의 성공 여부는 집단 행동과 조직화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불매운동과 시위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프로급 선수 개인의 서사와 사회 정의 관련 주제를 이렇게 섞어버리는 메시지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캐퍼닉의 행동은 스포츠 업계와 스포츠 뉴스 업계가 그간 잘 다루지 않았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을 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이키의 광고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같은 효과를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나이키가 야채를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맥앤치즈에 컬리플라워 간 것을 섞는 부모처럼 캐퍼닉의 메시지를 광고에 잘 녹여냈다면, 저는 광고를 지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광고는 오히려 캐퍼닉의 메시지에 물을 탈 뿐 아니라, 나아가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이 광고에서 캐퍼닉의 시위와 묶여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라면 “신념을 가지라”는 슬로건 뿐인데, 사실 이 슬로건은 캐퍼닉을 경기장에서 몰아낸 “경찰의 목숨도 중요하다(#BlueLivesMatter)” 진영이 가져다 써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구호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인종 차별이라는 불의에 맞섰다는 이유로 나이키를 찬양하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나이키는 이번 광고로 매출 신장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 상에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홍보 효과를 누렸습니다. 미국인의 다수가 국가 연주 중 항의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여론 조사 결과는 여러 번 나온 바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키는 “다수의 미국인”에게 물건을 팔 필요가 없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광고의 타겟이 아닙니다. 나이키의 주요 고객층은 소득 중상위층의, 도시 거주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의 정치색은 이미 트럼프보다 캐퍼닉의 것에 가깝죠. 여론 조사 결과를 보아도, 30세 이하의 젊은 층, 민주당 성향의 비백인들은 캐퍼닉의 행동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기장에서 뛰지 않아도 계속해서 캐퍼닉 굿즈를 대량으로 구입해 온 바로 그 집단입니다.

나이키가 캐퍼닉의 시위를 활용해 돈을 벌어보겠다는 시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캐퍼닉 역시 나이키와의 계약을 통해 돈을 벌었죠. 좋은 일에 기부도 많이 한 그가 경기를 뛰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생계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훈훈한 일입니다. 또한 세계적인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규범으로, 인종주의를 주변부의 소수 의견으로 보이게 한다는 효과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캐퍼닉은 단순히 대화를 촉발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경기장에서의 시위 이후에도 국가에 의한 대량 감금, 경찰의 군대화, 일상 속의 인종차별 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밝혔습니다. 나이키의 광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광고는 캐퍼닉의 유명세를 활용할 뿐, 그의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광고에는 그의 신념, 희생, 투쟁과 관련된 어떠한 선언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 광고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발을 팔기 위해 만들어졌죠. (슬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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