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 개념에 대한 도전 (2/2)
그의 이론에서 시간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아인슈타인이 오래전에 보인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시간은 그저 다른 것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그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로벨리는 시간을 “기하학적 공간에 대해 더 복잡하게 기하학적으로 얽혀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특히 로벨리의 이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으로 가면 시간이 사라집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그저 인간의 “모호한”인식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침침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그림자의 연극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로벨리에 따르면,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열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서 그는 왜 우리가 과거만을 알 수 있고 미래는 알 수 없는지 묻습니다. 그는 그 답이 열은 따듯한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흐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커피에 떨어진 얼음은 커피를 차갑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반대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역학 2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열은 한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를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인 엔트로피를 이용해 설명합니다. 과거의 엔트로피는 더 낮았습니다. 미래의 엔트로피는 더 높아집니다. 미래는 더 무질서하며,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카드 한 팩은 깔끔하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지만 미래의 카드 한 팩은 더 섞여있고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엔트로피, 열, 과거와 미래는 우주의 근본적인 특성이 아니라 우리의 관찰 결과 때문에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극미의 세계를 관찰해보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사라집니다.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서 ‘원인’과 ‘결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로벨리의 책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리를 처음 접하자 마자 포기해버린 나같은 사람의 요약은 빨리 잊어야합니다. 그러나 나는 로벨리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의 완벽한 독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또한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뻐하는듯 했습니다. (“시험에 통과했어요.” 그가 한 말입니다.)
“나는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에게 맞게 글을 쓰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리학을 전혀 모를 뿐더러 물리학에 관심도 없는 사람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부였던 할머니에게 설명하듯이 글을 썼지요. 그리고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상상했고, 나와 같이 물리학을 연구하는 동료들 또한 내 책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생각했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역시 물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입니다.”
그의 책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물리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 역시 그의 책을 좋아합니다. 그의 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중간에 있는, “물리학을 조금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물리를 비판합니다.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계산하라? 누가 그런 걸 신경쓰나요? 나는 다음 생에는 물리학 교과서를 쓰고 싶어요.”) 그는 세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로 나뉜 것을 “바보같은 일이죠, 마치 영국의 학생들을 둘로 나눈뒤 한 쪽에는 음악을, 다른 쪽에는 문학을 가르치고 음악을 배운 학생들은 소설을 못 읽게 하고 문학을 배운 학생들은 음악을 못듣게 하는 식입니다.”
그의 글이 즐거운 이유는 그가 매우 넓은 문화적 식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역사 지식은 그의 책을 처음 읽는 이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는 과학과 인문학 학생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과학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루트비히 볼츠만, 로저 펜로즈가 프루스트, 단테, 베토벤, 그리고 호라티우스 – 각 장은 로마시대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 와 함께 등장하며 마치 블랙홀과 스핀, 확률 구름의 세계로 떠나기 전에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한껏 느끼게 만드는 듯 합니다.
“호레이스는 친밀하면서 서정적이고, 또 극도로 강렬하지요. 그는 가장 위대한 시인입니다.” 로벨리의 말입니다. “그의 시에는 향수가 나타나는데 – 괴로움이나 슬픔이 아닌 – 바로 ‘이번 세상을 열정적으로 살아보자’는 느낌이지요. 어렸을때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 어네스토가 준 이 호레이스 시집을 나는 평생 가지고 다녔습니다.”
로벨리는 인간의 삶을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우주적 관점과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과 즐거움이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차가운 과학”과 인간의 내적, 영적인 삶 사이에도 모순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과 슬픔 또한 자연의 본성인 것이지요. 자연은 그저 원자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물리학과 시를 비교하며, 두 학문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려 애쓰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본래의 언어 외에도 비유와 은유를 사용해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을겁니다. 로벨리는 인상적인 비유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는 것은 환상이며, “이세상의 사건들은 영국인들이 하듯이 순서를 지켜가며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인처럼 난리북새통을 만들며 일어납니다.” 시간 개념에 대해서는 “시간에 대한 환상은 하나씩 하나씩 벗겨졌습니다.” 우리는 “시간성에 대한 모든 흔적이 사라진 텅빈, 아쉬운 아름다움만으로 반짝이는 본질만이 남은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 중에서 로벨리는 BC 1세기 경 로마의 시인이었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장대한 서사시를 썼던 루크레티우스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로벨리는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한 생각은 아닐겁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서야 이를 증명했으며, 18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틀린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벨리와 루크레티우스의 공통점은 뛰어난 언어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한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주를 더 잘 이해할수록 가지게 되는, 잘못된 믿음이나 미신을 버리고 일종의 담담한 마음을 즐기면서 얻게되는 이성적인 관점입니다. 동시에 로벨리는 인간의 본질이 사랑, 공포, 욕망, 열정이며 이들이 바로 우리의 덧없는 삶, 곧 우리에게 할당된 매우 짧은 시간을 비로소 의미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디언, Charlotte Higg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