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도 영어로 말하는 헐리우드 영화의 세계
제니퍼 로렌스가 러시아 스파이를 연기하는 “레드 스패로우(Red Sparrow)”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게 뻔한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일단 여성이 주인공이고, 신선한 반전을 선보이죠. 하지만 한 가지 면에서만은 뼛속까지 헐리우드 영화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러시아어 대신 러시아풍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까요. 러시아인 스파이가 술 취한 미국 여성을 두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다가는 저 얼굴에 총을 쏴버리고 싶을 것”이라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러닝타임 내내 어설픈 동유럽식 영어 악센트를 들어야 하는 관객들도 그 비슷한 심정일지 모릅니다.
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제작에서 헐리우드는 장족의 발전을 보여 왔습니다. 의상에서 세트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부분에도 고증에 공을 들이고 있죠. 하지만 언어에서만큼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등장인물들이 러시아어로 겨우 몇 마디 정도의 대화를 가까스로 소화한 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센트로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신작인 “레드 스패로우”도 근 30년 전에 나온 “붉은 10월(The Hunt for Red October)”에서 나아진 것이 거의 없죠.
배경이 고대 로마건, 웨스테로스의 일곱 왕국이건 상관없이 “이국적인 인물”, 특히 악당들에게 영국식 영어를 쓰게 하는 것도 전형적인 해법입니다. 외국어는 고사하고 악센트라도 제대로 익혀서 구사하는 배우들은 매우 드물죠. 2007년 작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에서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한 비고 모텐슨과 같은 예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요.
최근에는 영화 속 외국어 환경이라는 과제를 영화의 한 요소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블랙 팬더(Black Panther)”에서 흑인 배우들은 “아프리카 악센트”로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실 “범아프리카 악센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작자들은 넬슨 만델라의 모어인 코사어(Xhosa)를 극 중 와칸다 왕국의 언어로 쓰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실존하는 문화를 헐리우드 오락 영화에 갖다 썼다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영화에 이국적인 색채를 더하는 데 성공했죠. 다만 아무런 기준 없이 영어와 코사어 사이를 오가는 대사들은 플롯이나 캐릭터를 풍부하게 하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작품 가운데 가장 대담한 언어 사용이 두드러진 것은 단연 “컨택트(Arrival)”였습니다. 외계인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우주선을 끌고 지구에 나타나자, 당국은 언어학자를 현장에 보내 외계인들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합니다. 영화 속 언어학자가 언어학 지식을 활용해 외계인의 시각 언어를 해석하는 부분은 실제 학계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영화의 핵심 주제는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뇌와 사고방식의 회로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다는 언어학의 이론 그 자체입니다. 다만 그 차용이 워낙 극단적이라 관객은 영화 원작이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을 수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영화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왜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은 언어를 현실적으로 그려내지 않는 것일까요? 2차대전 시기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에는 다국어를 구사하는 캐릭터가 여럿 등장합니다. 크리스토프 월츠의 경이로운 언어 구사 능력은 플롯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죠. 실제로 아버지가 독일인인 배우 마이클 파스벤더도 영화 속에서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합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영국인 스파이인 파스벤더의 캐릭터는 언어가 아닌 손 제스처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맙니다. 영화 내내 관객은 왜 특정 장면에서 특정 캐릭터가 특정 언어를 쓰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주시해야 합니다. 언어가 하나의 캐릭터인 셈이죠.
실제로 여러 언어가 구사되는 환경에서 만들어진 “외국 영화”들은 다양한 언어를 보다 자연스럽게 녹여냅니다. 어쩌면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관객이 영화 속 다국어 구사를 편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을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관객이 이국적인 배경을 원하지만, 익숙한 얼굴과 사운드를 원한다는 생각에서 말이죠. 하지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컨택트”의 흥행에서 우리는 이제 영어권 관객들도 확실한 이유가 있다면 자막을 읽으며 영화를 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헐리우드에서는 비백인 배우와 여성 배우들을 중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어 면에서도 같은 시도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