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공장식 축산은 어쩌면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2018년 2월 26일  |  By:   |  칼럼  |  2 Comments

동물의 역사는 희생의 역사였습니다. 동물들은 역사상 여러 차례 명멸했죠. 하지만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사육되고 도축되는 가축을 인류가 소비하고 처분하는 방식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일지 모릅니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동물을 죽이고 때로는 멸종시키며 진보해 왔습니다. 수천 년 전 구석기시대를 살던 우리의 조상도 이미 여러 차례 진행된 생태계의 재앙에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4만5천 년 전, 인류의 조상은 지금의 호주에 처음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는 호주 대륙에 있던 대형동물 90%의 멸종으로 이어졌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생태계에 급격한 영향을 미친 아마 최초의 사례였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1만5천 년 전. 인간은 이번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호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형동물의 75%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프리카, 유라시아 대륙과 주변의 수많은 섬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멸종 뒤에는 늘 인간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해보면 땅속에 묻혀있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비슷합니다. 아직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지 않는 비극의 첫 장면에는 대형동물의 종류와 개체수가 모두 풍부합니다. 이윽고 인간이 모습을 드러내죠. 이는 화석이 된 뼈에 남은 창과 같은 도구를 쓴 흔적, 혹은 불을 땐 흔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간이 생태계의 중심에서 빠르게 번성함과 거의 동시에 크고 작은 동물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종합해 계산해보면, 호모 사피엔스는 선사시대에 이미 육지에 사는 대형 포유동물의 절반가량을 멸종시켰습니다. 선사시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농경을 시작하기 전, 금속으로 도구를 만들기 전, 문자로 무언가를 기록하기 전, 혹은 화폐를 만들기 전으로 이미 인간은 그때부터 사실상 지구를 정복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다음번 중요한 변곡점이 있다면 바로 농업혁명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하던 인간은 한 곳에 정착해 살며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혁명과 함께 지구상에 전에 없던 새로운 생물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 가축입니다. 처음 인간이 가축으로 삼은 동물은 포유류와 조류를 포함해 20종이 채 되지 않았기에 가축의 등장이 미치는 영향도 별로 크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야생”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축을 기르는 것은 점차 표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은 지구상의 모든 대형동물의 90%를 넘습니다. (여기서 몸무게가 몇 kg 이상 나가면 대형동물로 분류합니다) 예를 들어 닭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1만 년 전만 해도 닭이 사는 곳은 남아시아에서도 특정 지방에 국한됐습니다. 지구 전체로 놓고 보면 닭은 희귀한 새에 속했죠. 오늘날엔 남극을 빼면 그야말로 전 세계 어디서나 닭을 기릅니다. 가축으로 기르는 닭은 지구 역사상 가장 널리 퍼져 서식하는 조류일 겁니다. 개체수로 어떤 동물이 지구상에서 번성했는지를 판단한다면 닭, 소, 돼지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한 동물입니다.

한편,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은 (개체수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대가로 전에 없던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앞서 지구상에서 수억 년을 살아온 동물인 만큼 웬만한 고통이나 절망적인 상황은 다 겪어봤을 것 같지만, 농업혁명 이후 인간이 기르는 가축으로 살아야 하는 건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고, 대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동물에게 더욱 끔찍해졌습니다.

사실 얼핏 보면 야생에 남은 다른 동물이나 그 조상들보다 가축이 되어 사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도 합니다. 야생의 들소는 하루 대부분을 먹을거리와 물, 그리고 쉴 곳을 찾아 헤매야 합니다. 사자나 기생충을 비롯해 다양한 천적을 만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홍수나 가뭄 같은 악천후도 견뎌내야 합니다. 반면에 인간이 기르는 소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을 가축을 먹이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소와 송아지는 먹을거리, 물, 쉴 곳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주인이 다 주죠. 주인은 또 가축이 병에 걸리면 치료해주고, 포식자나 자연재해로부터 가축을 지켜줍니다. 그 대가는? 모두가 알다시피 소든 송아지든 언젠가는 도살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과연 이런 가축의 운명이 야생 들소의 운명보다 못하거나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자의 먹이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것과 인간의 손에 도축되는 것 가운데 어떤 게 더 나을까요? 악어의 이빨과 도축장의 쇠로 된 칼날 가운데 어느 것이 덜 포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가축의 운명이 유례없이 끔찍해진 이유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보다도 가축들의 하루하루 삶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서 가축을 사육하느냐에 영향을 미친 요소로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다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에게 가축이 필요했습니다. 가축의 고기와 젖, 알, 가죽이 필요했고, 가축의 힘을 빌려 노동 생산성을 높였으며, 가축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가축이 오랫동안 살아남아 가급적 새끼를 많이 낳게 하는 것도 인간에게 중요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 가축을 괴롭히고 잔혹하게 다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기르는 소에게 먹을 것과 물을 주지 않으며 젖만 짜내려 하면 젖은 갈수록 말라갈 뿐만 아니라 소도 곧 죽고 말 겁니다. 가축을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가축이 죽지 않고 새끼와 알을 낳으면서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정확히 말하면 제공하기 위해 희생하는 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인간이 찾은 그 방법은 가축으로 전락한 동물에게는 그저 끔찍한 나날일 뿐입니다. 가축이 된 동물도 육체적, 감정적, 또는 사회적 습성이 있습니다. 그 습성은 야생에서 살던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가축을 기르는 농장에서 이런 습성은 대개 별 쓸모가 없습니다. 가축을 기르는 주인들은 당연히 이런 습성을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억누르거나 거세해 버립니다. 동물들을 좁은 우리 안에 가둬놓고, 뿔과 꼬리를 잘라내며, 어미와 새끼를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선별적 육종 방식을 통해 어떻게든 몸집이 큰 동물을 만들어냅니다. 이 모든 것이 동물들에겐 엄청난 고통이지만, 죽지 못해 사는 동물들은 강제로 사육당하고, 생식당합니다.

이런 상황은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어긋납니다. 즉, 생물의 모든 본능과 욕구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진화론의 핵심인데, 농장에서 사육되는 가축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해당 동물이 본능과 욕구에 따라 진화해 번성한 결과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동물의 본능과 욕구에 따른 필요는 농장에서 사육하는 가축의 생존과 번식에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능과 욕구는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진화적 압력을 견뎌내고 충족하는 쪽으로 발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화적 압력 기제가 사라진다고 해서 오랫동안 그에 맞춰 발달해 온 본능과 욕구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생존과 번식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본능이나 욕구라 해도 이는 여전히 동물들의 주관적 경험에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 소와 개, 인간의 육체적, 감정적, 사회적 습성은 현재 환경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수천, 수만 년 전 조상이 맞닥뜨리고 헤쳐나갔어야 하는 진화적 압력의 산물입니다. 현대인이 단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21세기 인간이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먹지 못한다고 생존이 위협받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면 석기 시대 인류의 삶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때 우리 조상들이 자연에서 마주칠 수 있던 단 음식이란 아마도 잘 익은 과일 정도가 전부였을 텐데, 조상들은 먹을 수 있는 과일을 발견하면 즉시 (다른 동물이 먹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이 먹어치워 필요한 영양분을 채웠습니다. 단 것을 찾는 우리의 습성 기저에는 수만 년 전 선조들이 처했던 진화적 압력이 있는 셈입니다. 왜 젊은 남자들은 운전대만 잡으면 차를 거칠게 몰고, 폭력적인 시비에 휘말리는 데도 개의치 않으며, 인터넷 사이트를 해킹해 비밀정보를 빼내려 하는 걸까요? 이것도 오래전에 형성된 유전자의 명령을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7만 년 전,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의 조상을 생각해 봅시다. 사냥에 나선 남성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매머드를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용감한 자가 무리 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오래전 사냥에 나선 선조를 무모하리만치 용감하게 몰아세웠던 마초 유전자가 지금 인류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겁니다.

오늘날 공장식 축사에서 사육당하는 소와 송아지에게도 진화에 관련해 정확히 똑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야생 들소는 사회적 동물이었습니다. 사회적 동물이란 같은 종 안에서 서로 소통하고 협동하며 효과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동물이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회적 동물과 마찬가지로 야생 들소는 어렸을 때 놀이를 통해 중요한 사회적 기술을 배우고 사회성을 기릅니다. 강아지, 새끼 고양이, 송아지는 모두 그런 측면에서 사람 어린아이와 똑같습니다. 어린 동물이 매일 놀고 싶어 하는 건 진화를 통해 체득한 본성의 발현입니다. 놀지 않으면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사회성을 기르지 못합니다. 만약 고양이나 송아지 가운데 돌연변이로 노는 데 관심이 없는 유전자를 지닌 개체가 태어났다면 그 개체는 살아남지 못하고 번식도 못 했을 겁니다. 돌연변이 유전자도 도태됐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개체가 번식에 성공해 자손을 낳았으리라는 가정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어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늘 꼭 붙어 있으려는 애착도 진화를 통해 본성에 아로새긴 특징입니다.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관계를 약화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는 곧 사망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다른 우리에 가두어 기르며, 질병을 예방하는 백신을 놓아주고 물과 사료를 주며, 암컷이 가임기가 되면 좋은 씨수소의 정자를 받아와 인공수정을 시켜 송아지를 배고 낳게 하는 주인의 행동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객관적으로 이제 송아지는 어미와 꼭 붙어있지 않아도, 같이 뛰어놀며 사회성을 기를 또래 송아지가 없어도 멀쩡히 살아남아 다른 송아지를 낳을 때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것들은 인간인 주인이 다 챙겨주는 거죠. 그렇지만 객관적인 사항 말고 가축의 처지에서 생각해 봅시다. 송아지 유전자에는 앞서 살펴봤듯 수만 년 전 입력된 본능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어미 소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울어대고, 다른 송아지와 계속 장난을 치고 놀려고 하는 것만 보면 알 수 있죠. 본능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송아지는 무척 괴롭습니다.

수천 세대 전에 형성돼 유전된 본능과 특성이 이제는 생존과 번식에 필요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본능을 충족하지 못하면 괴롭고 불행함을 느낀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기본 상식입니다. 농업혁명이 인간의 손에 가축의 본능을 깡그리 무시하면서도 여전히 가축의 생존과 번식을 보장하는 식으로 길들일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점은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가축들은 전체 개체수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한 성공을 거뒀지만, 동시에 개체별로 따져보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아마 가장 끔찍한 삶을 사는 아이러니가 발생했습니다.

지난 몇 세기를 거치며 전통적인 방식의 농업이 산업화하고 근대화되면서 상황은 거듭 악화됐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가 로마제국, 혹은 중세 중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보다 유기화학이나 유전학, 동물학, 역학 등에 관해 아는 것이 훨씬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축의 삶에 개입하는 정도가 덜했던 것이죠. 옛날에는 여느 마을이든 집 뒷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는 닭들이 마을 곳곳,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낱알을 주워 먹고 벌레를 잡아먹었습니다. 닭들은 헛간이나 외양간 한구석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곤 했죠. 그 시절에 어떤 농부가 야망을 품고 닭 1천 마리 정도를 한 공간에 몰아넣고 대량으로 기르려 했다면 당장 조류독감이 창궐해 모든 닭이 떼죽음을 당했을 겁니다. 조류독감에 닭이나 새만 걸리란 법이 없죠. 사람에게도 옮는 독감이 창궐하는 날엔 그 마을 사람들도 떼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이는 신부님이나 그 어떤 영험한 무당이나 주술사가 와도 막을 수 없는 겁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바이러스와 항생제, 그리고 조류에 관한 여러 지식을 쌓은 인간은 마침내 동물들을 극단적으로 다루는 법을 본격적으로 익힙니다. 백신과 의약품, 호르몬, 살충제, 중앙 통제장치를 통한 온도 관리와 자동 사료 공급기 등이 있어 이제는 닭 수만 마리를 한곳에 몰아넣고 달걀과 닭고기를 그야말로 공산품을 찍어내듯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공장식 축산을 통해 사육당하고 도축 당하는 가축의 운명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가축의 숫자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대부분 대형동물은 공장식 축사에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자나 코끼리, 고래, 펭귄이 자유롭게 뛰노는 지구를 상상하곤 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이나 디즈니 만화영화, 혹은 어린이 동화책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미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현재 약 4만 마리의 사자가 있는 것으로 집계됩니다. 반대로 가축으로 기르는 돼지는 10억 마리입니다. 코끼리는 50만 마리, 펭귄이 5천만 마리 정도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는 반면, 가축으로 기르는 소는 15억 마리, 닭은 2백억 마리가 있습니다.

지난 2009년 기준, 유럽에 있는 모든 야생 새의 개체수가 약 16억 마리였습니다. 같은 해 유럽의 양계장에서 기르는 닭이 총 19억 마리였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축의 무게를 모두 더하면 약 7억 톤에 달합니다. 인간의 무게가 약 3억 톤이고, 야생에 사는 대형동물은 그 무게를 모두 더해봤자 1억 톤도 되지 않습니다.

가축으로 사육되는 동물의 운명에 관한 논의를 단지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복잡한 감각과 감정이 발달한 지각 있는 동물 대부분을 아우르는 문제입니다. 가축의 생사는 그저 생산 공정의 하나로 취급될 뿐, 동물의 감정과 본능은 아무런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40년 전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이제는 고전이 된 책 <동물 해방>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동물에 관한 사람들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싱어는 공장식 축산이 일으킨 고통과 처참함은 역사상 일어난 모든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을 다 합한 것보다도 크다고 말했습니다.

이 끔찍한 비극에 동물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은 인간이 이룬 산업화를 보조하고 촉진하는 차원에서만 가축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조작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연구해 제공해 왔습니다. 관련 연구는 가축도 엄연히 지각이 있는 동물이라는 점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동물의 복잡한 사회적 관계, 정교한 심리적 패턴 등은 연구 대상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동물의 지능이 인간보다는 낮을 겁니다. 그러나 동물도 고통, 두려움, 외로움을 모두 절절히 느낍니다.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쁠 때는 좋아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과학적 발견을 신중하게 다시 검토하고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논의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힘이 계속 커질수록 다른 동물을 해치느냐, 혹은 다른 동물과 공존하느냐도 갈수록 우리의 손에 달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40억 년간 지구상의 생물들은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라 피고 졌습니다. 이제 여기에 인간의 지능적인 설계가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생명공학과 나노공학, 그리고 인공지능 덕분에 인간은 곧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의 존재 자체를 새로 규정할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예 새로 정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을 새로 설계하고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과제 앞에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삶뿐 아니라 지각이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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