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과 무전유죄
2018년 2월 23일  |  By:   |  경제, 세계  |  No Comment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는 중범죄로 다루는 절도죄에 해당하는 범행 액수를 무려 40년 만에 처음으로 높였습니다. 버지니아의 사례에서 무척 특이한 미국 형법 탓에 지금껏 죄질이 별로 무겁지 않은 잡범들도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취급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도나 공공기물 파손 등 재산을 훔치거나 빼앗는 범죄를 처벌하는 법은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경범죄로 처리해도 되는 가벼운 범죄와 중범죄로 처벌하는 무거운 범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준이 너무 오래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데, 예를 들어 버지니아주는 지난 1980년 의회가 결정한 중범죄 기준을 지금까지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의회는 절도 액수가 200달러(우리돈 약 21만 원)가 넘으면 중범죄로 취급한다고 기준을 정했었죠. 그러나 이후 모두가 알다시피 물가가 계속 오른 탓에 상대적으로 사소한 물건을 훔쳐 경범죄로 기소돼 처벌받았을 범인들이 중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2017년에 안경점에서 240달러어치 안경을 훔친 범인은 원칙대로라면 중범죄로 처벌받게 돼 있습니다. 기준이 만들어진 1980년에는 비슷한 안경이 80달러 정도밖에 하지 않았으니, 경범죄로 처벌을 받았을 겁니다. 바뀐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법의 원래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범죄로 기소돼 재판을 받으면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고, 형 집행이 끝난 뒤에도 직업을 구하는 데 제약을 받으며 어떤 주에서는 투표권마저 박탈되기도 합니다.

버지니아주는 중범죄로 다루는 절도액 기준을 500달러로 높였습니다. 다른 주들도 비슷한 법 개정을 마쳤거나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마다 절차도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심각하지 않은 죄에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곳이 있습니다.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에 라이노타이프 식자기로 글자를 넣어 신문을 인쇄하던 시절, 편집인은 때때로 지면 하단에 일부러 공간을 남겨놓고는 오래된 옛날 법 가운데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법을 짤막하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네소타주에서는 다른 주로 넘어갈 때 오리를 머리에 이고 가면 불법입니다. 그게 도대체 왜 법에 저촉되는 건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래된 법으로 현실에 맞지 않지만, 어쨌든 여전히 법이 폐지되지 않았으니 법은 법인 셈이죠. 이런 짤막한 기사는 대개 독자들을 즐겁게 하는 게 목적이지만, 동시에 세월이 흘렀는데도 현실에 맞춰 바뀌지 않은 법을 찾아내 개정을 촉구하는 뜻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제정한 법이 현재 실정에도 맞는지를 정기적으로 따져보도록 아예 원칙을 정해 법에 못 박아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특히 세금과 관련된 많은 법을 비롯해 물가 상승이 법의 적용과 판단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분야가 많습니다. 이에 일부 의회는 아예 물가 인상률에 발맞춰 법이 기준으로 삼는 액수를 조정해야 한다고 법에 명시하기도 했습니다. 알래스카주 의회를 통과한 형법 주요 개정안을 보면 절도죄를 구성하는 액수 기준에 물가 변동을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즉, 지금은 절도 액수가 1,000달러를 넘어야 절도죄로 처벌한다고 했지만, 이 기준은 5년마다 물가를 고려해 바꿀 수 있다고 정한 겁니다.

알래스카주의 실험이 그 효과가 입증되고, 다른 주도 비슷한 규정을 도입하면 중범죄를 처벌하고 예방하는 데 한정된 자원을 더 많이 집중시킬 수 있고, 사소한 죄를 지은 사람이 지나치게 무거운 처벌을 받는 문제도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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