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루이스 CK의 세상에서 여성 코미디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 코미디언이자 “코난쇼” 작가인 로리 킬마틴(Laurie Kilmartin)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제가 루이스 CK를 만난 것은 올봄, 뉴욕의 한 극장에서였습니다. 그는 “새터데이나잇라이브”에서 선보일 모놀로그를 연습 중이었고, 과연 재미가 있었죠. 백스테이지에서 그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게 오해라면, 그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면 정말 좋겠다고요.
스탠드업 코미디는 여성에게 힘든 업계입니다. 198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데뷔한 이래, 제가 함께 일했던 코미디언이나 클럽 주인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죠. 불편한 포옹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익히고, 고개를 돌려 입술을 향하는 키스를 뺨에 받아내며 버텨낸 세월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추행 사실을 폭로한 여성들과 달리, 루이스 CK에게 추행을 당한 적은 없습니다. 동의 없이 제 앞에서 자위를 한 남성도 없었죠. 하지만 제가 아는 거의 모든 여성 코미디언에게는 갈 수 없는 클럽이 최소한 한 군데, 연락할 수 없는 클럽 주인과 매니저가 최소한 한 명씩은 있습니다. “그 클럽은 포기하자. 그 사람이 거기 주인이잖아.” “그 극장에서는 공연하지 말자. 그 사람이 거기서 일하잖아.” “그 TV쇼는 포기하자. 그 사람을 거쳐야 하니까.” 불편한 남성을 피하려고 돈 벌 기회를 마다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놓쳐버린 기회가 평생 얼마나 많았을지요! 코미디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들이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 위에는 추가적인 장애물이 존재하니까요.
제가 일하는 코미디 클럽은 평범한 곳입니다. 여느 코미디 클럽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곳이죠. 내가 지어낸 이야기로 관객을 웃기는 것이 저의 직업입니다.
무대 위에서 일하는 저에게 시비를 걸거나 훼방을 놓는 사람은 대부분 남성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말로 그를 때려눕혀야 합니다. 옷차림을 조롱하거나, 잠자리 능력을 의심하는 발언으로 모욕을 돌려줍니다. 그것이 성공하면 일자리를 잃는 대신 박수갈채를 받는 곳이 바로 코미디 클럽입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으면 클럽 경비를 불러 그를 쫓아낼 수도 있죠.
그렇습니다. 제게는 무례한 남성을 일터에서 쫓아낼 수 있는 권력이 있습니다. 백악관 언론담당관도 간절히 원할 만한 능력이 아닌가요? 어떤 여성인들 그런 힘을 마다하겠습니까?
하지만 여성 코미디언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런 힘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코미디언이 다시 여성이 되는 순간이죠. 업계 거물이 나를 앞에 두고 자위를 해도, 그의 매니저에게 불평하지 말라는 소리나 듣는 여성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스탠드업 코미디 업계에서 무대 위아래의 대비는 이처럼 극명합니다. 무대에 서야 비로소 무대 아래의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Hulu)에서 제공하는 다큐멘터리 가운데 “Too Funny to Fail”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루이스 CK가 수석 작가였고, 작가 채용을 담당하고 있었죠. 그리고 작가진은 당연히도 전원 남성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다 특출난 코미디언이었죠. 하지만 수석 작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지원하지도 않고 포기해버린 여성 작가들이 정말 없었을까요? 그런 식으로 포기해버린 여성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제가 남성 코미디언인 평행우주를 상상하곤 합니다. 이 평행우주에서 나는 돈도 많고, 어떤 쇼에서든 주연을 맡고, 내가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아들 양육을 전담하는 희생을 마다치 않는 아내가 있는 사내입니다. “오해”를 살 걱정 없이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으므로 네트워킹에도 더 능하고, 뒤풀이에 참석해 술도 마시면서 더 많은 일을 딸 수 있죠.
이 바닥에서 모든 신인이 원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무대에 설 기회입니다. 스탠드업 코미디 업계에서 지름길은 없죠. 최소한 10년은 매일같이 무대에 서야 좋은 코미디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무대를 따내는 방법에 왕도는 없습니다. 낮 동안 내내 줄을 서야 한 자리를 따낼 수 있는 오픈 마이크, 새벽 1, 2시에 신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오픈 마이크에 도전해야 하고, 친구를 동원해 객석을 채워야 하는 일도 흔합니다.
남녀 코미디언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불편한 그 사람”을 피해 다니다 보면 기회를 놓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10번 공연하는 동안 남성 동료가 12번 공연하면, 그는 나보다 빨리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무료 공연이 관례라 가난은 길어집니다.
라인업의 대부분이 남성인 쇼에 출연하게 되면 저는 객석의 여성들을 주시합니다. 계속되는 남성 코미디언들의 무대를 보면서 “또 남자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날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이 마침내 무대에 서면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옵니다. 단 몇 분이지만, 남성 코미디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남성 코미디언들이 왜 남성 일색인 라인업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지, 쇼에 여성 동료를 넣자고 하지 않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남자 코미디언이 되어 “또 남자야?”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면 자신에게도 훨씬 좋은 일일 텐데 말이죠.
루이스 CK 사건의 폭로 이후 한 친구는 제게 “다음에 터질” 업계 거물 남성 두 사람의 이름을 문자로 보내주었습니다. 성범죄가 마침내 진지하게 다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상어들을 피해 헤엄치느라 고군분투한 지난 30년 세월이 떠오릅니다. 상어를 피해 다니는 데 쓴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썼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까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남성들이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여성 코미디언을 무대에 올리고 작가로 쓰는 것이 업계를 바꿀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