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피터, 윌리엄? 영어 이름 버리고 나서 저 자신을 찾았죠.”
2017년 2월 22일  |  By:   |  문화, 칼럼  |  No Comment

지난 설을 즈음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기숙사에서는 서구식 이름이 아닌 학생들의 문패만 누군가 고의로 훼손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서구식 이름과 눈에 띄게 다른 동아시아 출신 학생들의 이름이 주요 표적이 되었죠.

“외국인 혐오 정서가 교내에 퍼지고 있어 우려된다.”

학교 측은 아시아 학생회에 메일을 보내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중국계 학생들은 페이스북에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설명하는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영상 속 학생들의 말처럼 중국어 이름에는 참으로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란(欣然, Xinran, 한국식 음으로 읽으면 흔연)이란 이름은 “즐겁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라”, “가족의 전통을 지키며 문화를 창달하다”, “영화 뮬란의 주인공처럼 영웅적인 여성” 등 몇 음절 안 되는 이름에 상당히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한자 이름을 영어를 비롯한 서구 언어로 옮겨놓으면 그 뜻은 사라지고, 알파벳의 낯선 조합, 발음하기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이름만 남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외국에 살거나 외국인과 교류해야 하는 중국인은 그 나라식 이름을 새로 짓는 게 좋을까요? 정답이 없는 논쟁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일단 서구식 이름을 쓰는 데 따르는 장점은 명확합니다. “캔디”, “프로미스”, “데빌” 같은 이상한 이름을 써서 급조한 티를 내지 않는 한, 흔히 쓰이는 영어식 이름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고 내게 다가오기 쉬워집니다. 하지만 여러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과 영어로 소통하며 함께 공부한 지난 몇 년간의 경험 끝에 저는 그냥 중국어로 된 제 원래 이름을 쓰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저란 사람을 정확히 알리는 동시에 스스로 어색하지 않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William), 피터(Peter), 제임스(James), 다시 윌리엄. 제 영어 이름은 사실 숱하게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냥 제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핑(Ping)으로 제 이름을 정했죠. 2년 전 언론학 석사 학위를 따려고 홍콩으로 가면서 내린 결정입니다.

중국의 많은 밀레니얼 세대와 마찬가지로 저의 어릴 적 영어 이름을 지어주신 건 선생님이었습니다. 영어 수업 시간에 쓸 이름으로 유치원 선생님은 제게 윌리엄이란 이름을 붙여주셨죠. (어머니는 제가 반의 남자아이 중에 가장 귀여워서 선생님이 영국 윌리엄 왕자의 이름을 따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하지만, 아마도 그건 대단히 주관적으로 미화된 어머니의 기억일 겁니다) 초등학교 가서 제 영어 이름은 제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피터로 바뀌었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정해진 이름 목록 가운데 제가 그 이름에 배정된 거죠. Peter와 Linda는 중국의 영어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제 이름을 결정할 수 있던 건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제 영어 이름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고, 선생님께서 원하는 이름을 대보라고 하셨을 때 우물쭈물하고 말았죠.

“황저핑, 이름 생각한 거 있니?”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몇 초 정도 망설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후보를 냈습니다. 말을 입 밖에 꺼낸 순간 후회했지만요.

“프로도(Frodo)요.”

저는 그때 한창 반지의 제왕에 빠져 있었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키득키득 웃어댔습니다. 선생님은 반지의 제왕에 관심이 없으신 건지, 그 이름은 프랑스어 같다며 다른 이름을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이름이 순식간에 거절당하자 제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습니다. ‘NBA 선수 중에 아무나 골라야겠다, 코비? 아냐 그건 프로도보다 더 이상해. 르브론? 제임스? 그래 제임스로 하자.’

그때부터 2년 동안 제 영어 이름은 제임스였습니다. 사실 그때는 외국인을 만날 일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영국 에든버러에서 온 피오나라는 이름의 교환학생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안녕, 내 이름은 제임스 황이야.”라고 말하는 저를 보고 그 친구가 얼마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자기소개를 하는 제 목소리나 표정에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제임스라고 저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도저히 제가 제임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요.

대학교에 와서 저는 다시 제 첫 이름 윌리엄으로 돌아갔습니다. 외국에서 온 친구들이나 교수님께 저를 윌리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윌리엄인 것처럼 보이려 애를 썼습니다. 소셜미디어에 제 이름을 쓸 때도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썼고, MP3 플레이어에 새겨넣은 이름도 “William”을 택했습니다.

대학교 시절 저는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 만큼 두 가지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친한 친구들, 특히 중국인 친구들 사이에서는 저는 핑으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친구에게 처음 저를 소개할 때나 중국말을 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저는 핑이 아니라 윌리엄이었습니다. 제 모든 지인은 저를 핑으로 아는 사람과 저를 윌리엄으로 아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핑의 영어 이름이 윌리엄이라는 걸 아는 이도, 윌리엄의 원래 중국 이름이 저핑이고 줄여서 핑으로 불린다는 걸 아는 이도 없었습니다. 이때 저는 과연 영어 이름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홍콩에 오면서 저는 윌리엄이란 이름을 버렸습니다. 석사과정 동기 학생 가운데 한 명, 그리고 중국계 미국인인 교직원 한 명이 윌리엄이란 이름을 쓰고 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 저는 제 원래 이름인 저핑을 줄여 저 자신을 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사실 친한 친구들만 저를 별명 부르듯 핑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외국인들도 제가 소개한 대로 저를 핑으로 부르자, 생각지 못했던 좋은 점이 나타났습니다. 우선 석사과정 동기 가운데 중국 이름을 쓰는 몇 안 되는 중국인이다 보니, 외국인 동기들이 제 이름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고 잘 기억했습니다. 저는 어느 모임, 어느 조직에서나 ‘우리가 아는 유일한 핑’으로 통했습니다. “앤지? 캐나다에서 온 앤지랑 중국인 앤지 중 어떤 앤지?” 혹은 “아, 장지안 말하는 거지? 걔 영어 이름 있었어? 토미? 난 몰랐네.” 이런 대화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 됐죠.

핑이 사실 저의 온전한 이름이 아니란 걸 안 외국인 친구들이 어떻게 하면 ‘저핑’을 제대로 발음하느냐며 서툴지만 제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려 하는 모습은 여전히 고마운 일입니다.

심지어 이름에 저마다 뜻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제 이름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 한자로 쓰는 건 어떻게 쓰는지를 물어보는 친구도 있죠.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喆平”이라고 제 이름을 또박또박 써주고, 각 글자의 뜻도 알려줍니다. “喆”은 “두 배로 길하다”는 뜻이고, “平”은 “평안하고 견실하다”는 뜻이라고 말이죠. 저핑이라는 이름에는 사고 없이 무탈한 삶을 살라는 부모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뜻을 들은 친구들은 대개 정말 멋진 이름이라며 감탄하곤 합니다.

이름을 짓는 방식과 기저에 흐르는 문화는 분명 중국과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다릅니다. 제 이름도, 컬럼비아대학교 기숙사에서 떨어진 문패 속 이름도 이런 문화의 차이를 반영하죠. 많은 서구인은 그런 차이를 신기해하고 매력적인 문화라고 여깁니다. 당신이 중국인이고 외국인과 교류할 일이 생기면 꼭 당신의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소개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는 데 좋을 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쿼츠의 기자가 된 뒤 저는 바이라인에 쓸 이름으로 저의 원래 이름 황저핑을 택했습니다. (미국식으로 이름과 성의 위치가 바뀌어 Zheping Huang이 되었지만요) 결국 저의 정체성에 온전히 맞는 이름은 원래 제 이름 하나뿐이라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저의 동료 첸시이(Siyi Chen)도 저와 무척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중국에서 학교를 다닌 그녀도 루시, 수잔, 클레어까지 수많은 이름을 썼는데, 미국에 살면서 오히려 시이라는 원래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미국인 아기가 그녀의 이름을 “See”라고 써서 주변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지만, 시이는 자기 원래 이름 덕분에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이 아니라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점이 부각되는 것을 포함해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서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영어 이름을 쓰는 게 이상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제 중국인 친구들 가운데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영어 이름을 쓰며 편하게 잘 사는 친구들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중국 이름이 일레이인 제 친구는 일찌감치 발음이 비슷한 “Elaine”으로 영어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떤 이름은 영어로 발음했을 때 의미가 좋지 않은 단어를 연상케 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헤슈팅 정도로 발음되는 “何诗婷”은 여자 이름으로 흔하지만, 특히 He Shiting처럼 영어로 쓰고 나면 부르기 난감한 이름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게 아무래도 낫겠죠. 하지만 상황이 어떻든 결국 선택은 개인의 몫입니다.

“अनिका” 이 힌두어를 아니카로, “かいと” 이 일본어를 카이토라고 읽는다면 “小明”도 샤오밍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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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커피숍 용 이름”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미국 커피숍에선 음료를 주문할 때 이름을 알려줬다가 음료가 준비되면 (진동벨 대신) 고객의 이름을 불러 알리곤 하는데, 특히 영어로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들이 커피숍에서만 쓰는,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만드는 겁니다.

저도 커피숍에서만 쓰는 이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제 이름을 사랑하는 만큼, 특히 단골 커피숍에서는 다른 이름을 쓰기 싫어서 서너 번씩 또박또박 제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들려주고 가르쳐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발음 구조가 다른 만큼 우리에겐 참으로 간단한 두 음절이 저들에겐 한마디로 발음 불가 영역이었습니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마을 사람들이 “Smith”란 이름을 “스미스(혹은 스미쓰)”로 발음하자 미군 조종사가 답답해하던 것과 비슷할 겁니다. 제 이름을 듣고 주문받은 사람이 컵에 써놓은 알파벳 철자 종류만 열 가지가 넘습니다.

넓게는 외국인으로, 혹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는 고충 아닌 고충일 수도 있습니다. 황저핑 기자의 칼럼은 중국 이름을 사례로 들었지만, 어렸을 때 영어학원 선생님이 이름을 지어준 일화처럼 한국 독자들도 공감할 지점이 많은 글이라는 생각에 전문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