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의 정의에 있어서의 미묘한 딜레마(1/2)
(캐롤 타브리스는 사회심리학자이며 엘리언 애런슨과 함께 “거짓말의 진화 – 자기 정당화의 심리학(Mistakes Were Made (but not by ME))”를 썼다. 캐롤은 스켑틱 잡지에 분기에 한 번씩 “날파리(The Gadfly)”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칼럼시리즈의 제목인 “파리떼(The Gadfly)”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사전적 의미로 파리떼는 소나 다른 가축을 괴롭히는 파리를 의미하며, 사람을 가리킬 때는 “비판, 논리와 아이디어에 대한 공격, 그리고 잡다한 요구 및 요청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분노하게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넓게 보아 이 단어는 불량배나 악당, 그리고 인터넷 트롤 – 내가 특히 원하지 않는 부류 – 을 포함한다. 또한 “자극하는(provoke)”은 매우 적절한 동사로, 파리떼는 우리를 잠에서 깨우고, 지금까지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였던 전제를 다시 고려하게 하며 또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이런 자극을 주어왔으며 또한 이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70년대 당시 젊은 사회심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나는 내가 강간 사건에서 피고를 위해 증언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시의 강간 법은 강간의 정의를 흔히 여겨지는 것처럼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을 대상으로 그녀의 동의 없이 성교하는 행위”로 내림으로써 “부부 강간”은 아직 강간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었다. 남자들은 이런 농담을 했다. “마누라조차 강간하지 못한다면,” 1979년 캘리포니아의 상원의원 밥 윌슨이 여성들 앞에서 한 농담이다. “누굴 강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을 농담으로 삼는 일과, 여성은 날 때부터 마조히스트적이기 때문에 강간을 원한다는 말도 안 되는 강간 이론에, 그리고 여성 혐오적인 강간 방법에 분노했다. 강간이 가진 잔인성과 그럼에도 강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화가 만연해 있음을 온 나라가 알게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따라서 한 여성 변호사가 내게 자신의 사건을 도와달라는 부탁에 나는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고객은 그가 무능력으로 해고한 한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고소인은 피고인의 변호사가 묻는 말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해고되고 한 달 뒤에야 상사를 고소했습니까? 저는 트라우마에 걸려있었습니다. 왜 사건이 일어난 당시 병원을 찾아가거나 누군가에게 이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왜 사건 당시에 혹은 그 사건 이후로 아무런 감정적 혹은 신체적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요? 아무런 증상이 없는 것이 바로 “강간 트라우마 증후군”의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는 그녀의 주장인, 그녀의 사무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묻는 데 거침이 없었다. 당신 상사가 의자에 앉아있는 당신 위로 걸터앉았다고요? 그러나 그 의자에는 팔걸이가 있었다. 그가 당신을 의자에서 일으켜 문을 잠그기 위해 한쪽 팔을 목에 감고 당신을 끌고 갔나요? 그러나 그녀는 그보다 더 크고 무거웠다. 그가 당신의 목을 한 팔로 감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손으로 당신의 치마를 올려 팬티스타킹을 벗겼나요?
법정은 고요했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옆에 앉은 한 여성은 내게 말했다. “팬티스타킹은 천연의 정조대랍니다.” 피고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나는 그 변호사에게서 다음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1. 이데올로기를 정의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이는 억울한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것이다.
2. 당신이 사용하는 단어를 정의하고 정확한 질문을 던지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3.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하나의 특별한 사건에서 내가 무조건 옳을 것이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강간이라는 단어는 매우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두운 뒷골목의 괴한만이 아니라 잘생긴 영웅이 어쩔 줄 모르는 소녀를 그녀의 의지에 반해 “취하는” 느낌도 선사한다. 따라서 “강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의해야만 한다. 물론 그 정의는 시대에 따라 급격하게 바뀌어 왔다. 미국 법원과 FBI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강간의 정의를 계속 확대해 왔으며, 오늘날 강간은 한 사람의 어떤 구멍에든 다른 사람이 강제로 자신의 신체 혹은 다른 도구를 집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남편도 아내를 강간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10대 청소년이 빗자루 손잡이를 가지고도 강간을 할 수 있다. 창녀와 포르노 배우도 강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대학에 입학하는 모든 여학생의 19%가 강간을 당하거나, 또는 강간 시도를 당할 것이라 주장하는 연구결과를 언급했을 때 그 숫자는 당장 언론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여자 대학생 5명 중 1명이라니! 이는 강간이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심지어 현실을 잘 알 만한 두 명의 법대 교수조차 미국의학협회지의 “뷰포인트” 칼럼에서 그 숫자를 아무 생각 없이 인용했다.[1]
미국 전역의 밝혀진,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모든 범죄를 추정하기 위해 이루어진 전국범죄피해자연구(The National Vrime Victimization Study) 결과는 1995~2011년 강간을 당하거나 강간 시도를 당한 여자 대학생의 비율이 1% 이하임을 밝히고 있다.[2] 그렇다면 앞서 19%라는 숫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오바마가 인용한 연구는 2007년 단 두 대학에서 이루어진 온라인 설문조사의 결과이며, 특히 연구자들은 강간에 “강제키스”와 “껴안기(fondling)”, 그리고 “옷 위로의 성적인 접촉” 같은 “성추행”을 포함했다.[3] 내가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껴안는 행동은 분명히 불쾌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간이 아니다.
슬레이트지에 글을 쓰는 뛰어난 탐사기자 에밀리 요프는 이 때문에 과장된 숫자들을 면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말한다.[4] 그녀는 4명 중 1명의 여자 대학생이 강간을 당할 것이라는 결과를 도출한 2000년 성피해여자대학생연구(Sexual Wivtimization of College Women)를 함께 언급했다. 이 연구도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이들은 이렇게 높은 숫자를 얻기 위해 결과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어떤 정상적인 과학자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를 해석했다. 그들이 처음 얻은 결과는 응답자 중 1.7%가 강간을 당한 적이 있으며, 1.1%가 강간시도를 당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간 시도 역시 강간과 비슷한 상처를 주기 때문에 두 숫자를 더해 2.8%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숫자가 25%가 된 것일까? 그들은 이를 위해 미래를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6개월 동안 전체 학생의 2.8%가 강간의 피해자가 됐다면, 1년 동안 그 숫자는 5%가 될 것이며 (여름 방학 3개월을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졸업에는 평균 5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숫자에 5를 곱해, 짜잔! 25%를 만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자 대학생의 25%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강간이나 성폭행의 피해자가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연구자들도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았던 것인지 4명 중 1명이 강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실제 증거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을 남겼다. 요프는 저자의 각주에서 아래와 같은 면책조항을 발견했다. “이 추정은 추정에 불과하다. 정확한 피해 비율을 얻기 위해서는 일군의 여자 대학생을 장기간 추적해 그들의 피해를 기록하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를 두 차례 겪었다면, 나는 대학생활 동안 10건의 교통사고를 겪게 될 것이다. 1학년 때 사고를 당해 내가 무언가를 깨닫고 앞으로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 조심할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통계 조작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데이터를 조작한 명백한 사례다. 즉 어떤 시도가 여성(또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이나 다른 폭력을 줄이지 못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강간은 그 자체로 끔찍한 일이며, 심각한 일이고, 또한 피해자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숫자로 전국적인 혼란을 야기하거나 또는 득보다 실이 많을 대학 정책의 근거로 쓰인다면, 우리는 그 숫자의 현실성을 가능한 한 침착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지적 때문에 “강간 문화에 길들여졌다”든지, 가해자를 편들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스켑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