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21일 부고) 칼 세이건, 과학 대중화에 앞장선 천문학자, 62세로 세상을 하직하다
2016년 12월 21일  |  By:   |  과학  |  No Comment

(역자 주: 아래는 1996년 12월 21일 뉴욕타임스에 올라온 칼 세이건의 부고 기사입니다. 칼 세이건의 20주년 기일을 맞아 이를 소개합니다.)

텔레비전과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우주의 경이를 알리는데 앞장 섰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어제 시애틀에 위치한 프레드 허친슨 암 병원에서 향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병원의 대변인 수전 에드몬드는 그의 사인이 골수이형 증후군(myelodysplasia)의 합병증인 폐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병을 2년 간 앓아 왔으며 지난 1995년 4월 이 병원에서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의 치료를 더 받았습니다.

그는 코넬 대학의 행성 연구소 소장이었고 데이비드 던컨 천문학 및 우주과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과학자로써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퓰리처 상을 받은 베스트 셀러를 썼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로 하여금 과학과 우주에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유명인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내가 아는 어떤 이 시대의 과학자 보다도 대중들에게 과학의 경이와 중요성에 대한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잘 알았습니다.” 미 국립 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원장 브루스 알버트의 말입니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오랜 믿음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은 그의 여러 작업 중 사람들의 관심을 늘 확실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가능성이 순전히 이론적이었던 시절부터 이 문제에 깊게 파고들었고, 다른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태양이 우주에서 매우 평범한 별이며 수없이 많은 태양이 이 우주에 존재하므로 문명을 이룩한 생명체가 우주에 매우 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1980년대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인 “코스모스”의 해설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원자의 세계에서 우주의 광대함에 이르는 모든 것을 다루었으며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사람들에게 우주의 경이를 전달했습니다. 60개국, 4억명이 시청한 이 시리즈는 1990년대 미국 남북전쟁을 다룬 시리즈가 방영되기 전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이가 시청한 텔레비전 시리즈였습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세계적인 유명인으로 등극했고 금전적 보상과 찬사를 모두 얻었습니다. 동명의 책은 1년 이상 베스트셀러 순위에 있었으며 그가 차린 칼 세이건 출판사는 RCA 음반사와 함께 “코스모스의 음악”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70년대와 80년대, “투나잇 쇼”에 26번이나 출연했으며 자니 카슨은 검은 가발을 쓰고 칼 세이건을 흉내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우주의 별의 수가 “수십 억의 수십 억 배”라는 칼 세이건의 표현은 코미디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1977년 그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수백 건의 강연 요청을 거절하지만 “투나잇 쇼”는 거절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의 수는 천만 명이에요. 이는 정말 큰 수에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죠.”

그는 자신의 과학 전도사 역할을 변명하며,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적어도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과학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과학 연구자금의 대부분은 정부, 곧 국민의 돈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돈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알릴 수록, 우리는 과학 연구를 지지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내가 느낀 감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자체가 무척 신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상아탑을 빠져나와 텔레비전 스튜디오로 간 그의 행동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다른 학계 인들도 있겠지만, 그가 뛰어난 과학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금성과 화성의 관찰

그가 20대이던 시절, 그는 금성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라디오 전파가 화씨 900도에 달하는 표면 온도 때문이며, 금성의 대기는 극한의 고온일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수년 뒤, 소련의 우주선은 그의 주장이 참임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칼 세이건은 그가 막 연구를 시작하던 시기에 화성의 색깔이 변하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화성에 어떤 형태의 식물이 존재하며, 이들이 계절의 변화를 따라 화성의 색깔을 변하게 한다고 말해지만, 칼 세이건과 그의 동료인 제임스 폴락은 화성 표면의 폭풍에 의한 먼지가 화성의 색깔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론은 1970년대 매리너 우주선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화성과 다른 별을 관측하는 NASA 의 여러 임무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는 1971년, 최초로 다른 행성을 돌도록 발사되었고 7,300장의 화성 표면 사진을 보내온 화성 탐사선 매리너 9호의 영상 팀이었습니다. 그는 최초로 화성 표면에 착륙한 1975년 발사된 바이킹 1호와 2호가 착륙할 수 있는 위치를 정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또한 1972년 발사된, 최초의 외행성 탐사선으로 목성을 스쳐 지나간 파이오니어 10호와, 1973년 발사되어 목성 및 토성을 스쳐 지나간 파이오니어 11호의 발사에도 관여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태양계 바깥을 향한 보이저 1호와 2호 계획을 만든 연구팀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들은 1979년 목성을 방문하고 다시 토성을 스쳐 지나갔으며, 1986년 최초로 천왕성을, 1989년 해왕성을, 그리고 1990년 명왕성을 지난 후 태양계의 가족사진을 최초로 찍었습니다.

보이저 우주선 연구팀의 일원으로 칼 세이건은 혹시나 수백년 뒤, 태양계를 벗어나 끝없이 여행할 이들에 외계의 생명체를 만나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보이저 우주선에 메시지를 싣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가 “우주라는 대양에 던져진 유리병”이라고 부른 그 메시지는 우주선 바깥에 부착된 알미늄 자켓 안에 든, 12인치 구리 레코드 판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언어로 된 사람들과 고래의 인사, 12분 길이의 에세이, 90분 길이의 음악, 그리고 흑백 혹은 칼라 사진으로 해석될 수 있는 데이터가 담겨졌습니다.

칼 세이건은 또한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핵전쟁의 폭발과 화염이 일으킬 먼지와 연기가 지구를 극히 차갑게 만들, 곧 “핵겨울”의 가능성을 다른이들과 함께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브루클린에서 자란 소년이 별을 향하기까지

칼 세이건은 1934년 11월 9일, 브루클린의 벤슨허스트 구에서 재봉공장의 재단사인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별에 관심을 가졌고 과학 소설의 애독자였으며 여덟 살 때 이미 다른 별을 도는 행성에 또다른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천문학을 해야 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어요. 그저 천문학이 나를 붙잡았고, 나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는 열 두 살 때 할아버지가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천문학자요.” “그래 좋지.”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습니다. “근데 어떻게 먹고 살려고?”

칼 세이건은 시카고 대학에서 1955년 학사 학위를, 1956년 물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1960년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UC 버클리 대학으로 갔다가 하버드 대학 천문학 조교수가 되었고, 1968년 코넬 대학으로 옮겨와 1971년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600 편 이상의 논문과 기사를 남겼고 소설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십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뉴욕타임스 서평란에서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우리 우주에 대한 그의 지리학적, 인류학적, 생물학적, 역사학적, 천문학적 묵상을 명확하게 기록하면서 상상력을 더해 그려냈다”고 평했으며, “그는 번쩍이는 불빛 아래 예측할 수 없는 생각을 나열하는, 무지개빛 스타일을 가졌다”고 덧붙였습니다.

1978년, 칼 세이건은 “에덴의 용: 인간 지능의 진화에 대한 소고”로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타임즈 지에 실린 리뷰에서 존 레너드는 이 책을 “기쁨”이라고 표현했으며 칼 세이건을 “과학계의 로버트 레드포드, 잘 생겼고, 분명하며, 모든 일에 뛰어나다”고 말했습니다.

우주에 대한 관심을

칼 세이건은 자신의 첫 과학소설 “컨택트”의 계약금으로 출판사 사이먼 앤 슈스터로부터 200만 달러를 받아 문학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84년 출간된 “컨택트”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부인 앤 드루얀과 함께 다음 해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제작했으며 1985년 워너 브라더스에 의해 개봉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저서들에는 “우주적 연결:외계의 관점에서(The Cosmic Connection: An Extraterrestrial Perspective), “다른 세상(Other Worlds), “브로카 뇌: 과학적 낭만에 대한 소고(Broca’s Brain: Reflections on the Romance of Science)”, “추위와 암흑: 핵전쟁 이후(The Cold and the Dark: The World After Nuclear War)” 등이 있으며 앤 드루얀과 같이 쓴 “혜성(Comet)”,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인류의 본질과 기원에 대하여(Shadows of Forgotton Ancestors: A Search for Who We Are)”,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천문학회 행성과학 분과의 과장이었고, 행성 연구 논문지인 이카루스의 편집장이었으며 행성학회의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미국립과학원의 최고 영예상, 공공 복지 메달, 그리고 NASA 가 수여하는 특별 공공 서비스 상을 두 번 받았습니다.

린 마굴리스와 린다 살츠만은 그의 전부인이며, 여동생 카리 세이건 그린은 텍사스 주 리그 시티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는 4남 1녀로 아들들은 각각 메사추세츠 앰허스트에 사는 도리언, 이타카에 사는 제레미, LA에 사는 니콜라스, 그리고 이타카에 사는 샘이 있으며, 딸은 이타카에 사는 알렉산더가 있습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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