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이론은 틀렸을까요? 스티븐 핑커의 답입니다.
노엄 촘스키의 활발한 정치적 활동은 그가 한 시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과학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게 만듭니다. 1950년대에 촘스키는 인간은 유아기의 환경적 자극이 깨우는 언어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언어 습득 이론을 계속 다듬어 왔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학자들과 마음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처음 그의 이론이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의 이론이 얼마나 오래 살아 남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어떤 비판들은 어이없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톰 울프는 자신의 새 책 “언어의 왕국(A Kingdom of Speech)”에서 다윈과 “노엄 카리스마”가 모두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울프에 대한 언론인 찰스 만의 신랄한 비평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진지한 비판도 있습니다. 지난 11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새로운 언어 이론(Language in a New Key)”에서 폴 이봇슨과 마이클 토마셀로는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지를 포함한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 업적 중 상당 부분이 뒤집히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글의 온라인판 제목은 “촘스키의 언어 학습 이론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었습니다. 이봇슨과 토마셀로는 아이들이 “일반 인지 능력과 다른 이의 의도를 읽는 능력”으로 언어를 배운다고 주장합니다.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자, 나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에게 촘스키에 대한 최근의 비판들을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언어 본능(The Language Instinct, 1994)”, “생각의 재료(The Stuff of Thought, 2007)” 등의 언어에 관한 훌륭한 책을 쓴 핑커는 이메일을 통해 일종의, 촘스키에 대한 변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곧, 촘스키를 비판하는 누구도 그의 “본능적 구조”를 전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언어 습득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그의 답변입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비판이 지난 50년 간 있었지요. 우선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학계에서 정론이며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이라는 식의 표현은 시작부터 맞지 않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과학 분야에서 한 번도 정론이 된 적이 없습니다. 매 시대 복수의 언어학자들이 촘스키의 이론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들, 예를 들어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인지문법(Cognitive Grammar), 관계문법(Relational Grammar), 어휘기능문법(Lexical Functional Grammar), 일반화구구조문법(Generalized Phrase Structure Grammar) 등의 대립 이론들이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보지 않았던 점도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촘스키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가 대다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지지한 반면,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더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퍼트냄, 굿맨, 설, 데닛 등의 철학자들이 그랬고, 70년대 제롬 브루너와 피아제 학파의 발달 심리학자들이 그랬습니다. 70년대 인공지능 중흥기의 테리 위노그라드, 로저 섕크, 마빈 민스키도 촘스키를 공격했습니다. 1980년대 연결주의 심리학자와 신경망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있고, 린다 스미스와 같은 “동적 시스템 이론가”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의 아동 언어 습득 연구자들은 촘스키에 반대했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는 오해가 생긴 이유는,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접근을 취하면서, 그의 이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유명세와 인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촘스키만을 알았을 뿐,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요. 즉, 명성과 학문적 위치를 혼동한 것입니다.
‘촘스키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주장이 가진 또다른 문제점은 ‘촘스키의 언어 이론’이 사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문(syntax)에 대한 몇 가지 기술적인 이론을 발표했고, 동시에 언어가 본능이라는 내용의, 논문의 형태가 아닌 비공식적인 주장을 수십 년 동안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확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엄밀한 형태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 또는 본능적인 “언어 구조(language faculty)”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특정 언어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예를 들어 일본어나 영어를 우리가 실제로 학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지요. 즉 50년 동안 언어의 특정한 측면이 학습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이들이 (실제로 매우 많았지요)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보물단지 역할을 촘스키가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방식은 과학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보다 정밀한 언어 습득 과정을 컴퓨터로 모델링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델은, 여러 문장들을 입력하면, 문법 구조가 출력되는 그런 모델 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이 실제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문장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모델이 어떤 모양이건,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 본능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도할 것입니다. (나는 1984년 나의 첫 저서인 “언어 학습과 언어 발달(Language Learnability and Language Development)에서 이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시도 없이,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어떤 본능적 구조나 가정,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80년대와 90년대 언어를 신경망으로 구현하려 했던 이들이 썼던 트릭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길때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보다, 그저 본능적인 구조를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델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스티븐 핑커
요약하자면, 핑커는 언어가 본능적이라는 촘스키의 기본적인 주장이 여러 다른 형태로 바뀌어 가며 지속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촘스키는 최근 뉴욕타임스를 통해 그의 본능적-언어 이론에 대한 톰 울프의 공격을 “읽고 웃을 수 있는 수준에도 전혀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20여년 전, 나는 촘스키에게 정치적 활동과 언어학 연구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놀랍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불의에 대항하는 것은 의무감으로 하는 일일 뿐, 지적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세상의 문제가 모두 사라진다면, 즐겁게 연구에 몰두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물론 세상의 문제는 계속되고, 촘스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미국 대선 이후, 그는 화석연료 소비의 제한을 거부한 도날드 트럼프와 공화당이 “인류의 삶을 파괴하기 위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언어학자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