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론 소킨이 트럼프 당선 뒤 딸에게 보낸 편지
2016년 11월 12일  |  By:   |  세계, 정치  |  48 Comments

록시야, 록시 엄마,

지난 밤 세상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식으로 바뀌어버렸다. 이건 정말 아빠로서 끔찍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일이란다. 굳이 애써 좋은 쪽으로 해석하지 않겠어.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사실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승리하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란 건 너도 잘 알 거야. 사실 어젯밤 패배가 벌써 여섯 번째니까. 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끔찍하고 위험한 생각밖에 없는 심각한 정신병자에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모르면 배워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무능한 돼지에게 선거에서 진 건 아빠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일이거든.

도널드 트럼프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더욱 무섭구나. 너도 알다시피 트럼프 지지자들 가운데는 인종차별주의 집단 KKK, 백인 우월주의자, 여성차별주의자, 어릿광대들도 섞여있잖니. 랩 음악이나 라티노 문화에서 온 축제 싱꼬데마요(Cinco de Mayo)가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문화라 여기는 분노한 젊은 백인 남성들은 선거 결과를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겠지. 자기 앞가림도 똑바로 못하면서 여성에 대해서는 그저 외모에 대해 평가밖에 할 줄 모르고 능력 있는 여성을 존중하기는커녕 못생겼다, 성격이 드세다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남자들이 어제 바로 여성혐오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놈을 대통령으로 만든 거란다. 증오가 활개 칠 공간을 얻었고, 절망적인 멍청함이 “기득권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의견”으로 포장됐어. 트럼프가 기존 질서를 개혁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빠는 백악관 접견실의 의자랑 탁자 위치 바꾸는 거 말고 트럼프가 도대체 뭘 어떻게 바꾸려는지 두렵기만 하구나. 워싱턴, 제퍼슨 같은 건국의 아버지, 링컨, 두 명의 루스벨트, 케네디, 그리고 버락 오바마까지, 역대 대통령의 이런 면면에 어제 미국은 새벽까지 트위터에서 자기를 비판한 사람들한테 욕이나 써대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을 더한 거란다. 이 세상에, 그리고 자라나는 다음 세대 앞에서 정말 면목이 없는 일이구나.

즉각적인 반응이 곳곳에서 나왔지. 당장 다우지수가 700포인트나 떨어졌고, <이코노미스트>는 장기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기사를 냈어. 나토의 동맹국들도 불확실성에 불안해하고 있고. 두려움이라면 무슬림, 멕시코 이민자, 흑인 등 소수계 미국인들을 빼놓을 수 없겠지. 이 사람들은 정말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야. 트럼프의 지지자들 가운데 우리 유대인을 달갑잖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란다. 반면 IS 본부는 트럼프의 당선에 지금 아마 축배의 밤을 보내고 있을 거다. 차라리 리처드 닉슨이 몇백 배는 낫겠어.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이런 황망한 결과에 분노하고 있는 게 우리만이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하렴. 수백만 미국인은 물론 수많은 지구촌 시민들이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분노하고 있단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트럼프 지지자들은 우리가 충격에 흐느끼고 울기만 하고 캐나다에 이민 갈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오히려 승리를 만끽하고 좋아할 거야.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 동부나 서부에 사는 잘난 엘리트들, 교육수준 높고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재수 없는 사람들, 할리우드 연예인 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 아빠는 절대 그렇게 소극적으로 주저앉을 생각이 없단다. 너도 그렇겠지?

우리는 진짜 미친 듯이 xxx 투쟁할 거야. (옮긴이: 소킨은 “we’ll fucking fight”이라 쓰고 가끔은 이런 단어가 아니고선 도무지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는 무기력하지 않아. 상원, 하원에서도 다수당을 놓쳤지만, 우리와 함께하는 후보를 당선시키기도 했잖니? 트럼프의 공화당에 속한 정치인들 가운데도 트럼프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도 하고. 우리가 워싱턴으로 보내는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 같은 정치인이 강고하게 우리를 대변해 싸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해. (옮긴이: 카말라 해리스는 캘리포니아 검찰총장 출신으로 이번 선거에서 미국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흑인 여성으로는 사상 두 번째 상원의원.)

우리는 항상 두 눈을 부릅뜨고 모든 걸 지켜봐야 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불의는 절대 참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후원금을 보내는 것이든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보내는 것이든 우리의 책무를 다하자꾸나. 사실 우리 가족은 아마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나타날 수많은 사회적 재앙으로부터 꽤 떨어진 삶을 사는 편이라 할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우리처럼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에게 힘이 되어줘야 해. 여성이 자기의 몸을 스스로 지키고 낙태할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수정헌법 1조를 위해 싸워야 해. 특히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단다.

어젯밤 선거로 우리나라가 더는 우리가 아는 미국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단다. 가장 칠흑같은 어둠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영광의 밝은 나날이 온단다. 그게 바로 미국이, 미국인이 지금껏 만들어 온 역사이기도 하단다.

록시야, 예전에 아빠가 해준 예측이 그대로 되지 않아서 너가 여러 번 실망했던 거 아빠도 잘 알아. 하지만 트럼프 만큼은 정말 너무 뻔히 보이는구나. 앞날이 어떨지. 탄핵 사유가 되고도 남는 범죄를 하루가 멀다고 저지를 놈이 트럼프야. 어찌어찌 심각한 위법을 저지르지는 않고 4년을 채웠다고 치자. 그때는, 아니 그러니까 지금부터 3년 뒤 다음번 선거를 치를 때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싸워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고 트럼프 같은 정치인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영원히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큼 타격을 줄 거란다.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2020년 선거는 록시 네가 태어나서 처음 하는 투표이기도 하니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 너희 할아버지가 2차대전에 참전한 뒤 미국에 돌아왔을 때 정부는, 사회 공동체는 그에게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줬어. 덕분에 가정을 꾸려 지금 아빠랑 록시가 있는 거 아니겠니? 아빠는 록시에게, 다음 세대에게 증오로 가득 찬 멍청이가 망쳐놓은 세상을 물려주지 않을 거야. 어젯밤 너의 눈물을 보고 다시 한 번 정신이 번쩍 들더구나. 다시는 이런 일로 괴롭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 갈게.

사랑한다.

아빠가

(배니티 페어)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