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펀딩] 종이 악보의 종말은 클래식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까?
2016년 7월 15일  |  By:   |  문화  |  1 comment

* 지난 스토리펀딩 5화에 올렸던 후보 가운데 종이 악보의 디지털화가 불러올 변화를 살펴본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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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립음악원이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 전시회에는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악보 한 장이 전시돼 있습니다. 그냥 악보가 아니라 메뉴인이 직접 연필로 빼곡히 메모해둔 종이 악보입니다. 각 마디를 어떤 식으로 연주할지, 바이올린 활을 어떻게 움직일지, 손가락 짚는 법, 속도, 비브라토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연주자의 해석과 기교를 빼곡히 적어 두었습니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학자인 피터 셰퍼드스켈브드(Peter Sheppard-Skaerved)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메뉴인이 남긴) 메모 하나하나가 곡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것들을 계속 파헤쳐 알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모두가 찾고 있는 광맥을 연필이 찾아주는 것 같다고 할까요.”

클래식 음악에서 이렇게 곡의 해석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건 여전히 아주 중요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등장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연주자가 종이 악보 대신 아이패드나 노트북 컴퓨터에 악보를 띄워놓고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실제 악보와 크기가 꼭 맞는 태블릿 PC가 등장하면서 이런 추세가 더 강화됐죠. 애플 펜슬처럼 태블릿 PC 화면에 직접 메모를 썼다 지울 수 있는 기능이 개선되면서 종이 악보에 연필로 메모했다가 지우는 고생을 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 음악축제에서 어떤 피아니스트가 본인에게 익숙한 5중주를 새로운 연주자들과 협연한다고 칩시다. 그 피아니스트는 원래 자신의 악보에 표시해 둔 셈여림과 템포에 대한 메모를 지울 필요 없이 새로운 악보에 새로운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할 때 필요한 주의사항을 따로 메모하고 저장해 둘 수 있습니다. 여러 마스터클래스에 두루 참여하는 젊은 연주자도 각 마스터클래스에서 얻게 되는 다양한 (때로는 상반되는) 가르침, 주의사항, 설명, 팁을 별개의 악보에 따로 기록해 둘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기록, 저장 차원에서만 유용한 건 아닙니다. 셰퍼드스켈브드는 흑연으로 만든 연필심의 대량 생산이 시작된 19세기 중후반 이후로 연주자들이 악보에 담긴 음악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던 사실을 지적합니다. 종이가 찢어지거나 상하지 않으면서 오래 가는 메모를 종이 위에 남겼다가 필요하면 지울 수 있는 연필을 누구나 쓸 수 있게 되면서, 연주자들에게 연습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완벽한 연주’를 목표로 하는 것이 됐습니다. 이전까지는 눈앞에 놓인 (아무런 메모도 없는) 악보를 참고삼아 실시간으로 즉흥적인 연주를 해내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연습의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곡이 원하는 바를 악보에 상세히 메모해 두고, 그대로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연습이 더 중요해진 겁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디지털 악보의 도래는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요? 디지털 악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클래식 애호가들과 포스코어(forScore), 토나라(Tonara) 같은 관련 앱을 만든 개발자들이 예측한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하향식 교육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즉, 곡을 해석하는 권위를 독점해 온 음악학자와 실제 연주자의 경계가 모호해진 겁니다. 학자들이 내놓은 악보의 최종적인 해석, 정답에 다시 물음표가 붙으면서 “완벽한 연주”라는 개념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 덕분에 이제 연주자들은 작곡가의 친필 악보를 비롯한 다양한 사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링컨센터 챔버뮤직 소사이어티의 예술감독 중 한 명이자 피아니스트인 우한(Wu Han)은 자신이 워크숍을 주최한 서울에서 스카이프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옛날에는 선생님께서 전수해 주시는 지식, 정보를 습득하는 게 전부였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누구나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찾고 해석하는 탐정이 될 수 있어요.”

스스로 아이패드 악보를 빨리 받아들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 감독은 다른 음악인들에게도 디지털 악보의 장점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그녀는 올여름에만 총 42차례 연주회를 여는데, 예전 같으면 곡의 악보만 챙겨도 여행 가방의 3/4이 찼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곡을 태블릿 PC에 넣어서 다닙니다. 종이 악보는 다음 장으로 넘길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만, 디지털 악보는 무선 페달을 밟기만 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소리 걱정은 할 필요가 없죠. (예전에는 연주할 때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면, 지금은 블루투스를 차단해놓은 중국 공연장이 더 문제입니다. 무선 페달을 쓸 수 없기 때문이죠.) 디지털 악보는 낱장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장기간 여행하는 동안 악보가 상할 우려도 없습니다. 마스터클래스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그녀는 자신의 태블릿 PC에 감상평을 비롯해 생각나는 것을 써놓았다가 각 연주자에게 맞춤형 노트 파일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우 감독에게 각 악구를 어떻게 연결할지, 어느 부분에선 어떤 감정을 살려 강약 조절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곡을 표현해낼지 등 곡 해석에 관한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음악을 만드는 작업의 가장 중요한 근간은 작곡가의 의도가 담긴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초기 판본이나 원본 등을 두루 살펴보고 연구하는 일입니다.

“예전에는 도서관에 자료들이 구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죠.”

이제는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 같은 기관들이 일일이 공을 들여 악보를 디지털로 바꾸어 인터넷에 올려놓은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비싸고 거추장스러운 복사기와 씨름하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바로 악보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되자, 편리해진 것 외에도 직접 악보 원본을 직접 보고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늘어난 것도 분명한 변화입니다. 첼리스트 맷 하이모비츠(Matt Haimovitz)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자필 악보와 아나 막달레나 바흐가 필사한 남편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원본을 다운받아 아이패드에 띄워놓은 채로 연주했습니다.

보로메오 현악 4중주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스 키친(Nicholas Kitchen)은 악보 원본을 보려면 도서관의 희귀자료 열람실에 가서 하얀 장갑을 쓰고 마치 가보를 다루기라도 하듯 조심해야 했던 옛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4중주단 멤버들과 함께 베토벤의 악보 원본을 화면에 띄워놓고 어떤 식으로 연주할지 논의하며 다 같이 메모를 남기며 읽어 내려갑니다. 키친은 과거 권위 있는 음악학자들이 “원본”이라고 정의를 내린 때 묻지 않은 판본들, 마치 최종본과도 같은 종이 악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훨씬 많은 종류의 세세한 사항들을 베토벤의 친필 악보에서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보는 종이 악보에는 강약을 표시하는 기호가 아홉 가지예요. 그런데 실제로 베토벤이 쓴 악보를 보면 약 스무 가지 다른 강약 기호가 등장해요.”

‘여리게 연주’하라는 뜻의 “피아노 (소문자 p)” 표시만 해도 그 안에서 또 정도가 나뉜다는 게 키친의 설명입니다. 베토벤이 어떤 건 ‘p’ 자에 줄을 하나 그어놓았고, 다른 건 두 줄을 그어놓은 것처럼 말이죠.

“피아노라고 다 비슷한 정도로 여리게, 부드럽게 연주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베토벤은 피아노를 또다시 열 가지 정도로 세분화해 구분해 놓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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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흐름을 창의적으로 바꾸어 놓은 베토벤 특유의 즉흥적 작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마디, 구절은 한눈에 보아도 급하게 지우고 고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런 부분에서 베토벤은 아마도 다른 식의 연주,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뛰어난 즉석 연주자로 잘 알려진 베토벤의 곡을 해석할 때는 곡이 쓰인 대로 연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의 귀가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연주하도록 몸과 마음을 내맡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키친은 말합니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하는 피프스 하우스 앙상블(Fifth House Ensemble)과의 공연에서 아이패드를 사용한 작곡가 댄 비스콘티(Dan Visconti)는 기술이 문화를 바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같은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악보를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연주자들도 더 이상 악보에 적힌 모든 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맹신하지 않죠. 그 결과 연주들이 어떻게든 악보에 적힌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났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학계의 영역이었던 정교한 원고 해석 작업을 연주자들이 직접 하다 보니 당장 전문적인 악보 편집자들의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이제 편집자들이 하는 일의 특성이 바뀌었습니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더 빨리, 더 유연한 방식으로 개정판을 내게 된 거죠.

하지만 음악 소프트웨어 회사 토나라의 음악팀장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론 레제프(Ron Regev)는 높은 품질의 클래식 음악 악보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전문 편집자들이 할 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디지털 기술이 접목되면서 이들에게 유리해진 점도 없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편집자들이 원본을 고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던 셈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한 번 고치고 나면 더는 손을 댈 수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최신 연구와 새로운 해석을 반영해 필요한 경우 끊임없이 곡을 다듬어나갈 수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바꾼 곡을 다시 인쇄해 배포할 걱정도 안 해도 되죠. 파일을 업데이트하면 되니까요.”

작곡가도 디지털 혁명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초고를 썼다가 이를 고쳐 쓰고 뒷부분을 다시 덜어내는 등의 과정이 잇따라 업데이트되는 악보 파일에 남아 연주자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니콜라스 키친은 보로메오 현악 4중주단이 작곡가와 함께 새 곡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작곡가가 현장에서 곡을 고쳐쓰기도 했고, 수정 내용은 무선으로 연주자에게 공유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처음 접했을 때 그 곡은 분명 베토벤 수준의 훌륭한 표현력이 없었어요. 하지만 수정을 거듭하며 최종본, 이어서 진짜 최종본, 마지막으로 진짜 진짜 최종본이 나왔죠. 음악학자들이 언젠가는 우리가 베토벤이 쓴 악보를 보고 진짜 이 음표를 여기에 놓기까지 어떤 고민을 했을지 추적하고 해석한 것과 비슷한 일을 지금 저희가 한 작곡, 편곡 작업을 두고 하게 되겠죠.”

새로운 기술의 접목으로 많은 것이 훨씬 명확해진 대신, 바흐의 곡에 메뉴인이 남겨놓은 분노에 찬 표현이나 슈베르트의 악보에 드러나는 예술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슈베르트가 드러낸 미묘한 감정선은 잡아내기 어려워졌습니다. 우한 감독도 과거의 작곡가들이 손으로 쓴 악보의 마디마디 사이에 묻어나는 감정의 흐름, 정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다고 고백합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종이 악보에서는 작곡가의 치열한 고민을 읽어낼 수 없죠. 손으로 쓴 악보를 보면 모차르트가 곡을 한꺼번에 쓰지 않고 부분부분 나누어 쓰면서도 얼마나 천재적으로 곡을 써 내려갔는지 발견할 수 있어요. (화가이기도 했던) 멘델스존의 “무언가(Songs Without Words)” 원본 악보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죠. 오늘날 군더더기를 다 빼고 정리된 악보만 접하는 우리는 작곡가가 어딘가 산만한 성격이었는지 꼼꼼한 성격이었는지를 알 길이 없어요.”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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