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들의 일상을 지켜온 공동체, 펄스는 그 어디에나 있습니다
2016년 6월 15일  |  By:   |  문화, 세계  |  No Comment

올랜도의 게이클럽, 펄스에서 대량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성소수자(LGBT) 공동체에 속한 수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 깊이 분노했습니다. 펄스는 “그 동네의 게이 클럽”이었으며, 그런 식으로 매체에 오르내릴 곳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영국의 게이 클럽은 일상의 일부로 스며들었으며 그중 몇 곳은 전설처럼 여겨졌습니다. 영국 게이 클럽은 성소수자의 문화를 주류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성소수자들은 동정이나 타자화, 배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각 동네의 게이 클럽은 성소수자 행사나 퍼레이드를 지탱하는 풀뿌리와도 같습니다. 펄스는 그 어느 동네,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모를 뿐이죠. 동네의 게이 클럽은 개개인의 경험을 짜맞추어 [성소수자에 대한] 국가적 용인을 이끌어내는 장소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게이 클럽에 가지는 않지만, 그곳의 경험은 우리 자신을 조금 바꾸고, 그 경험이 가져다준 기분은 조금씩 작은 변화를 만들어갑니다. 오마르 마틴의 총은 우리 성소수자를 성소수자로서 살게 하는 경험을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동네의 게이 클럽은 드랙 퀸들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내는 장소 그 이상으로, 우리 존재의 낯섦이 사라지는 장소입니다. 게이 클럽은 저 밖의 우리와 조금은 다르지만 여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집”이며, 사랑 위에 지어진 “집”입니다.

게이 클럽은 나름대로 생태계와 공통의 언어를 지니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고 교회에서는 거부하는 것들을 배우도록 돕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입장하고 나면 소수자는 이제 다수자가 됩니다. 그건 대단히 기이하고도 새로운 기분입니다. 짝을 찾는 장소로서의 게이 클럽은 잔인할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입장한 모든 이들은 동등한 선에 서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이 “게이 프라이드”에 대해 말할 때는 그러한 동등함, 심리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모두의 공간에 대한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삶의 생태계에 총상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펄스에 있던 남녀들은 그들이 그토록 영웅이 될 줄은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 주말의 대학살로 인해 그들은 우리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더 가디언 – 폴 플린 기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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