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통신, 한국 정부에 의한 부랑자 집단 학대 및 학살 사건 은폐를 보도하다 (3)
2016년 4월 29일  |  By:   |  한국  |  1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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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죽고 싶었어요”

형제복지원의 몰락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울산지검으로 막 발령을 받았던 김용원 변호사는 꿩사냥을 하던 도중 가이드로부터 인근 산속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대형 경비견을 끌며 죄수들을 지키고 선 경비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 씨가 그 장소를 찾아갔을 때, 경비원들은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의 목장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엄청나게 심각한 범죄”의 현장을 발견했음을 직감했다.

1987년 1월의 어느 추운 밤, 김 씨는 경찰관 10명을 이끌고 형제복지원을 급습했다. 높은 담장, 무거운 철제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설 내부의 초만원 기숙사에서는 영양실조 상태로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한 원생들이 발견됐다. 원생들은 예기치 못한 손님들의 방문에 벌떡 일어나 깍듯하게 군대식 경례를 붙였다.

“여기는 복지 시설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검찰을 떠나 서울의 한 법무법인에서 대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용원 씨는 지저분한 병동에 기침하고 신음하며 누워있던 사람들이 “그저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체포된 박인근 원장은 김 씨의 상사인 부산지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다음 날, 2014년 고인이 된 당시 김주호 당시 부산시장이 김 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박 원장을 석방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씨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로 수사의 고비마다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될 것을 우려한 윗선의 방해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 역시 민주화 시위대에 또 다른 스캔들이라는 빌미를 주고 싶을 리 없었다.

검찰 내부 문건에는 청와대가 김용원 검사의 수사를 저지하고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수차례 압력을 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김 씨는 정기적으로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직접 연락해 수사를 확대하지 않겠다며 윗선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후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박희태 당시 부산지검장은 수사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끈질기게 수사팀을 압박했다. 김용원 검사는 원생 한 명 한 명을 모두 인터뷰할 계획이었지만, 지검장이 만류했다. 현재 집권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인 박희태 씨는 AP의 인터뷰 요청을 거듭 거절했다. 박 씨가 수사에 대한 세부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박 씨 개인 비서의 전언이었다.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김 검사는 박인근 원장이 1985년과 86년에만 현재 가치로 3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횡령했음을 입증하는 은행 기록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박 원장이 횡령한 돈은 정부가 원생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하고 시설을 관리하는 데 쓰라고 지급한 보조금 1,000만 달러 가운데 일부였다. 그러나 부산지검장의 지시에 따라 횡령 액수를 절반 이하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현행법 아래서 종신형을 피할 수 있는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윗선에서는 또한 박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 전원에 형제복지원 전체에 만연했던 학대 혐의를 적용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김 검사가 꿩사냥 도중 우연히 발견한 건설 현장에서의 폭력으로 혐의를 제한하라는 것이었다.

김용원 검사는 박인근 원장에 대해 15년형을 구형했다. 1989년,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은 박 원장에게 횡령과 건설, 외국환관리법 등의 위반에 대해 2년 6개월형을 선고했다. 학대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복지원 간수 중에서는 단 두 사람이 각각 1년 6개월형과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생활을 마친 박인근 원장은 그 후에도 복지 시설 운영과 부동산 판매를 통해 부를 쌓았다. AP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자리는 2001년 한 건설회사가 현재 화폐 가치로 약 2,700만 달러에 매입했다. 박 씨의 딸이 운영하던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2013년에 문을 닫았다. 박 씨 가족은 운영하던 중증 장애인 수용 시설을 2014년에 와서야 매각했다.

 

“잊을 수 없는 고통”

형제복지원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있다.

복지원은 1988년에 문을 닫았지만, 1990년대에 건설 현장의 인부들이 복지원 뒷산에서 백골이 된 시체 약 100구를 발견하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부 이진섭 씨는 유골이 담요로 덮여있고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매장이 약식으로 서둘러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발견된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얼마 전 원생이었던 최승우 씨와 이채식 씨는 옛 형제복지원 자리를 찾았다. 지금은 아파트 건물이 높이 솟아있고, 옛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콘크리트로 덮인 저수지 자리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간수들이 시체를 산속으로 실어나르던 곳을 기억해냈다.

“아직도 시체 수백 구가 묻혀있을 겁니다.” 이 씨가 가파른 언덕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원생들은 노숙자가 되거나, 쉼터, 정신병원 등으로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알코올 중독, 우울증, 분노, 수치심과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최 씨의 등에는 큰 문신이 새겨져 있다. 복지원에서 나온 후 조직폭력단 생활을 했던 흔적이다. 경찰관을 폭행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막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몇 안 되는 원생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다. 감금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라고 경찰을 부추긴 공무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길 원한다.

“얻어맞던 고통, 시체, 막노동, 공포… 그 모든 나쁜 기억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모텔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이채식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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