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와 이별하는 작가들의 사정은?
2012년 영국의 작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는 로마로 거주지를 옮기고 모국어인 영어와 완전히 담을 쌓았습니다. 영어로 말하고, 듣고, 읽는 행위를 완전히 중단한 것이죠.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영어로 글을 써온 작가라면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자신이 글을 쓰는 언어 없이 작가라는 직업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태리어로만 글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팬들은 번역된 글을 읽고 싶지 않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탈리아인들조차 영어와 비교도 되지 않는 소수어인 이태리어로 글을 쓰겠다는 영국 작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라히리 이전에도 이런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모국어와 다른 외국어의 새로운 언어적 가능성, 즉 모국어에는 없는 단어, 언어의 리듬, 소리 등에 끌려서 언어를 바꿨습니다. 영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에게 영어는 폴란드어와 불어에 이은 제 3의 언어였지만 그는 영어 자체의 특별함에 매료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는 정치적, 상업적 이유로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썼지만, 서서히 영어라는 언어 자체의 매력에 빠졌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20세기 언어학자인 벤자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고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어가 생각을 결정한다는 것이죠. 이론의 여지가 있는 이론이긴 하지만, 작가가 다른 언어로 글을 쓰면서 세상을 달리 보고 새로운 글감을 얻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라하리도 이태리어로 “전향”하기 전 몇 달 간 새로운 방향, 새로운 접근법을 찾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때로는 다른 언어에 대한 매료보다, 모국어와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외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쓴 기존 작품들의 존재, 자신이 언어권에서 쌓은 명성, 해당 언어의 문학사가 작가에게 부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베케트는 초기 영어로 작품을 쓰면서 기존에 없었던 파격을 시도했으나 좋은 평을 얻지 못했고, “문체 없이 쓰기가 더 쉬운” 언어인 불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베케트가 자신의 영웅이자 멘토였던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력에 너무 부담을 느껴, 영어로는 창의적인 작품을 쓸 수 없었다고 평합니다. 즉 지적인 도전이나 언어학적 게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문학적 생존을 위해서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이후 불어로 쓴 자신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라히리는 베케트의 경우와 달리, 처음부터 영어로 글을 썼고 영어권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창작자로서 불안감을 느꼈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창작의 동력을 “익명성”에서 얻는데, 영어 작가로서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제약을 느꼈다는 설명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태리어로 쓴 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도 거부할 정도였습니다. 이태리어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녀는 새출발의 기회를 얻었고, 실패할 자유도 얻은 셈입니다.
작가들은 하나의 언어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언어와 관련된 모든 것, 나아가 문학적 전통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가로서 한계를 느꼈을 때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일종의 극약 처방인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새로 글쓰기를 배우고, 때로는 모국어와도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도 합니다. 영어와의 관계를 회복했던 베케트처럼 말이죠. 라하리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영어와 이별했지만, 이태리어로 글을 쓰다가 영어를 재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