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앵커가 반드시 화면 왼쪽 ‘상석’에 앉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2016년 3월 18일  |  By:   |  문화, 세계  |  No Comment

“보도국 전체에 걸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성차별 의식이 드러난 겁니다.”

왜 항상 남자 진행자가 화면 왼쪽에 앉느냐는 논란에 관해 미리암 오라일리가 일침을 가했습니다. 화면 왼쪽 자리는 대개 진행자 가운데 더 경력이 오래된 선배 진행자가 앉는 게 보통인데, 영국 TV 프로그램들을 보면 경력과 관계없이 항상 남자 진행자가 소위 ‘상석’을 독차지해 왔다는 겁니다. 방송 PD 사이에서 화면 왼쪽에 앉은 진행자는 흔히 주 진행자 혹은 1번 진행자(presenter one)라 불리고, 오른쪽에 앉은 진행자는 보조 진행자 혹은 2번 진행자(presenter two)라고 불립니다.

오라일리는 영국 방방곡곡을 찾아가 시청자들에게 소개하는 프로그램 “BBC 컨트리파일”을 2009년까지 진행했습니다. 2009년 나이 든 여성을 꺼리는 관행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부당 하차당했다며 BB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기도 했습니다.

논란에 불을 지핀 프로그램은 BBC의 아침 방송 프로그램인 “BBC 아침(BBC Breakfast)”로 지난 2월까지는 베테랑 진행자이자 이 프로그램의 터줏대감 격이었던 빌 턴불이 화면 왼쪽에, 그리고 여자 진행자인 루이즈 민친이 화면 오른쪽에 앉아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턴불이 은퇴한 뒤 그 후임으로 민친보다 한참 후배인 젊은 남자 진행자 댄 워커가 발탁됐는데, 여전히 워커가 화면 왼쪽에 앉고 민친은 오른쪽 자리에 남은 겁니다. 오라일리는 진지한 소식을 전하는 데는 남자 진행자가 제격이라는 근거 없는 편견이 방송국 전체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고 말했습니다.

“방송국의 높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남자가 전달하는 뉴스는 더 권위가 있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높은 사람들도 열에 아홉 남자죠. 수많은 뉴스, 시사 프로그램을 거친 제 경력을 통틀어 보더라도 거의 모든 PD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남자가 중심을 잡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더 낫다, 혹은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여기죠.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여자 진행자들에게는 철저히 보조적인 역할밖에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방금 전한 소식에 미소 짓고, 웃음 짓고, 반응하는 일이 대부분이죠. 가끔 몸매가 드러나는 의상을 입고 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일은 덤이고요. 안타까운 점은 많은 여성 언론인, 여성 진행자들이 충분히 1번 진행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경험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ITV에서 10시 뉴스를 진행하는 줄리아 에칭엄의 의견은 조금 달랐습니다. 에칭엄은 어느 쪽에 앉아서 방송을 진행하느냐보다 일한 만큼 공정하게 임금을 받는지, 즉 임금 체계에 성차별이 없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뉴스를 반으로 나누어 진행할 때 앵커의 성별에 따라 특정 주제, 특정 분야의 뉴스를 나누어 배정하지는 않는지가 제겐 더 중요해요.” 에칭엄은 지난해 10월까지 주로 가운데 자리에 앉아, 즉 양쪽에 남자 진행자를 앉혀놓고 뉴스를 진행해 왔습니다.

다시 “BBC 아침” 프로그램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10년째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루이즈 민친은 새로 들어온 댄 워커보다 나이도 아홉 살 더 많습니다. 민친은 화면 왼쪽에 앉고 싶다는 의견을 제작진에 전했지만, 제작진은 190cm가 넘는 워커의 큰 키 때문에 워커가 화면 왼쪽에 앉는 게 더 낫다며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민친이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시청자 가운데 이 점을 지적하며 BBC 내부의 암묵적인 성차별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이 문제는 이른바 “소파 게이트”로 번졌습니다.

줄리아 에칭엄은 미리암 오라일리 덕분에 여성 방송인이 나이가 들면 방송에서 설 자리를 잃던 부당한 관행이 널리 알려지고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경륜이 풍부한 중년 남자 진행자와 젊은 여자 진행자의 조합이 오랫동안 마치 정석인 것처럼 여겨졌잖아요. 그런 이상한 전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긴 합니다.”

BBC나 ITV의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대개 남자 진행자가 화면 왼쪽에, 여자 진행자는 화면 오른쪽에 앉습니다. 진행자가 세 명 이상이면 보통 남자 진행자가 중간에 앉고요. 어린이 앵커를 불러 어린이 뉴스를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어서 남자아이가 왼쪽, 여자 아이는오른쪽에 앉습니다. ITV의 “좋은 아침입니다(Good Morning Britain)” 프로그램에서는 나이는 더 많지만 방송 경력은 더 짧은 남자 진행자 피어스 모건이 여자 진행자 수잔나 리드와 방송 중에 자리를 바꾸어 앉으며 소파 게이트를 에둘러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방송 관계자는 성별이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성별보다는 경력, 혹은 선후배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대개 경력이 높은 진행자가 1번 진행자 역할을 맡는데 1번 진행자가 왼편에 앉는 거죠. 남자라고 반드시 화면 왼쪽에 앉으라는 법 같은 건 없어요.”

채널 파이브의 뉴스 에디터인 크리스티나 니콜로티 스콰이어는 남자가 왼쪽에 앉는 전통이 굳어져 모두가 그런 구도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두 진행자가 얼마나 호흡을 잘 맞춰 프로그램을 끌어가느냐이지 남녀가 어디에 앉느냐가 아니라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한 BBC 뉴스 앵커는 “화면 왼쪽 자리는 선배 진행자가 앉는 자리”라는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꼭 그런 건 아니긴 해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동료, 선후배도 있긴 하거든요. 하지만 대개 (화면) 왼쪽 자리는 제일 높은 선배가 앉는 자리로 여기는 것 같아요. 여기서 높은 선배란 방송 경력이나 직위 같은 거죠.”

반면 BBC 앵커 출신 셸라 포가티처럼 자리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저보고 어디에 앉겠냐고 물으면 저는 그냥 소파 뒤에 서 있겠다고 하겠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BBC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저보고 자리를 고르라면 저는 화면 오른쪽에 앉겠어요. 그 자리가 화면으로 볼 때 시청자와 더 가까워 보이는 자리에요. 그게 더 좋은 자리 아닌가요?”

방송 관계자들은 워커의 키가 실제로 자리를 바꾸는 데 제약이 되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살포드(Salford)에 있는 “BBC 아침” 프로그램 스튜디오는 매우 비좁은 편이어서 카메라가 진행자와 방청객을 화면에 담을 수 있을 딱 그 정도로 세팅돼 있습니다. 카메라 위치를 바꾸는 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키가 큰 사람이 화면 왼쪽에 보일 때 더 안정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BBC는 해명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BBC 아침 프로그램 소파에는 상석, 보조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진행자의 조합을 화면에 담았을 때 구도가 어떻게 잡히는지에 따른 기술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BBC는 프로그램 진행자 네 명 가운데 남자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 세 명이 여자라는 점을 덧붙여 강조했습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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