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은 사회문화적인 기대에 앞서 자기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2016년 2월 10일  |  By:   |  문화  |  No Comment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나는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추구하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작은 인간을 돌보는 주양육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며, 남녀평등이란 개념은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는 견디기 힘든 진실입니다. 남편의 노력 부족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직장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덕분에 편안히 살 수 있죠. 주말엔 기저귀를 갈고 아이들 둘을 데리고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합니다. 그 모든 노력에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양육에 관련된 거의 모든 책임이 내게 쏟아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아이를 돌보는 게 양육의 전부가 아닙니다. 집안 청소(어떻게 애 둘이 이렇게까지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수가 있죠?), 끝도 없는 빨래, 한 주에 세 번씩 이어지는 장보기, 식사 준비에 요리, 아이를 돌보며 겪는 감정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요.

어떻게, 한 페미니스트와 역시 페미니스트인 남편이 이런 전통적 성역할에 굴복하게 되었죠? 사회규범들은 체계적으로 한데 엮여 [전통적 성역할을 고수하는 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성역할에 대한 기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뼛속 깊게 박혀 여성의 노동을 폄하할 뿐더러, 여성을 수당을 받지 않는 주양육자로 여기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국에서 주양육자의 대다수는 여성입니다. 미국 심리학회에 따르면 주양육자의 68%가 여성입니다. 물론 양육자가 된다는 것이 부모가 되는 것이나 부모로 구성된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과 동일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퓨 리서치 센터의 최근 연구 역시 이러한 결과를 되풀이합니다. 부모 간 가사노동 분담에 있어 여성이 큰 몫을 짊어져야 한다는 심각한 성차(gender gap)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합니다. 심지어 페이스북의 COO이자 페미니스트인 셰릴 샌드버그조차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습니다. “양육에 따르는 책임은 거의 내가 짊어져야 합니다. 노동분담은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우리의 결혼생활을 고생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내 남편이 그간 받은 교육과 직업훈련을 일에 쏟아부으며 밖에서 점심을 즐기고 동료들과 해피아워를 갖는 동안, 내 석사학위엔 먼지가 쌓여 가고 동년배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란 고작해야 애들을 함께 학교에 데려다 주는 그 짧은 시간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의 심정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질투의 감정보다 더 나를 분노케 하는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정을 위해 그 어떤 모든 것이든 희생하고 해낼 수 있으리라는 사회문화적 기대입니다.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나 자신이란 존재는 단순한 ‘엄마’ 이상입니다. 내게는 직업적 성취에 대한 열망과, 내 아이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흥미와 열정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난 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들입니다. 그 때문에 내 정신건강과 결혼생활은 고통받았습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이제 의식적으로 자기자신을 돌보는 연습을 시작했으며, 다른 엄마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엄마로서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면서, 나는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워졌습니다. 나는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게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 것이든, 운동하러 나가 땀을 흘리는 것이든, 내 남편이 아빠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좋은 책과 함께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든, 나는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려 애씁니다. 나와 남편, 아이들 모두 나의 ‘이기심’에서 오는 혜택을 누립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기심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것이죠. 내 남편은 아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적어도 주말엔 모든 것을 반반씩 분담합니다. 부모가 가사노동을 함께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성역할에 따른 기대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깨닫길 바랍니다. (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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