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ON] 태초에 화학정원이 있었다 (4/4)
생명이 바닷속 화학정원에서 처음 탄생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은 얼핏 물리학의 법칙을 깨는 존재로 보입니다. 우주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은 언제나 더 어지러워지며 멋진 건물도 언젠가는 폐허로 변하게 됩니다. 엔트로피라고 불리는 이 성질은 열역학 제2 법칙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 우주의 어떠한 변화도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변화만이 가능합니다. 존 업다이크가 쓴 ‘엔트로피를 위하여(Ode to Entropy)’에서 그는 ‘한 번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2 법칙은 필연적인 것으로, 업다이크가 ‘멸종의 인장(seal of extinction)’이라 부른, 언젠가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고르게 분포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부터는 아무런 일도 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엔트로피에 반하는 현상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윈 슈뢰딩거는 이처럼 명백한 물리 법칙에의 위반을 깨닫고 1943년 자신의 강의를 모아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 1944)’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생명을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지만, 국소적으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찾은 존재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국소적인 엔트로피의 감소는 냉장고 내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냉장고란 전기를 이용해 자신을 냉각시키지만, 더 많은 열을 외부의 코일로 내보내는 장치입니다. (냉장고를 열어 놓아도 집이 시원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도 이와 비슷합니다. 생명은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을 조직적으로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열을 바깥으로 배출합니다. 슈뢰딩거는 생명은 오직 ‘외부로부터 질서를 끊임없이 빨아들임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명을 이런 관점, 곧 무질서에서 질서가 태어난 것으로 바라본다면, 생명의 탄생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생명이 우주적인 우연인지 자연법칙의 필연적인 결과인지는 우주생물학에서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분자 덩어리에서 생명의 우연적 발생의 확률을 쓰레기장을 덮친 토네이도가 보잉 747 비행기를 만들 확률에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이와 매우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발생은 질서와 무질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이란 곧 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질서정연한 상태가 되려면 그 전에 이미 질서정연한 상태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지질학적 질서가 먼저 있었기에, 어떻게 생물학적 질서가 지질학적 질서에서 탄생했는가가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카네기멜론대학교의 지질학자 로버트 하젠은 러셀의 바로 이 아이디어를 진화생물학에 대한 그의 진정한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기원, 곧 복잡성의 기원은 복잡한 환경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러셀의 에너지 중심 이론은 생명의 복잡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해줍니다. 약 100년 전, 과학자들은 살아있지 않은 시스템들도 환경에서 ‘질서를 빨아들여’ 마치 자신을 조직화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은 1960년대 러시아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이 ‘소산 구조(dissipative structure)’라 이름 지으며 학설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이 구조들은 쉽게 발견됩니다. 중력 때문에 물은 보다 질서정연한 회오리 형태를 띠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물을 더 빨리 내려보내 전체적인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 물을 더 빨리 내려보내는 낮은 엔트로피의 회오리 구조가 국소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약 욕조를 샤워기로 일정하게 계속 채울 수 있다면, 회오리 구조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가 계속해서 유입되면 이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명은 에너지 흐름에 대해 열려있는 구조에 속합니다. 러셀은 생명을 이런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생명에 대한 정의 역시 새롭게 내릴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주도한 건 에너지보다 화학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과학자들이었습니다. 이 관점은 1953년 당시 시카고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던 스탠리 밀러의 그 유명한 실험에 어느 정도 기인합니다. 그는 지구의 원시 바다와 비슷한 액체를 담은 유리병과 원시 대기와 비슷한 기체를 담은 유리병을 연결했습니다. 그 후 번개를 흉내 낸 작은 전기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일주일 동안의 실험 끝에 그 액체는 노랗고 연붉게 바뀐 뒤 결국 진한 붉은 색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리병 안에서 아미노산을 포함한 다양한 유기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체가 생명의 중요한 구성 요소임을 보인 것입니다.
얼마 후, 밀러는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습니다. 일간지들은 실험실에서 인공의 유기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다수의 화학자가 무로부터 생명을, 또는 적어도 생명과 관계된 화학물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몇몇 흥미로운 발견에도 불구하고 복잡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실험에서 가하는 원시 에너지, 곧 번개 혹은 자외선이 복잡한 분자를 만들기에는 너무 변덕스럽거나 너무 파괴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반면, 화학정원이라는 안정된 공간은 일정한 에너지 기울기를 만들며 이는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유럽 분자생물학 연구소에서 스스로 조직화하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에릭 카센티는 말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열수 틈 이론을 좋아합니다. 이 이론은 에너지 포텐셜 기울기와 화학물질의 기울기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기울기야말로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요소입니다.” 에너지 기울기가 없다면 RNA로 가득 찬 공간에 적절한 생명의 구성 요소가 다 모여있다 하더라도 생명은 태어나지 못합니다. 이는 생물학적 정보 체계, 곧 복제를 위해 필요한 기호들을 가진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체의 시작에 있어 핵심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형태를 만드는 것과 이 에너지를 이용해 DNA와 RNA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형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카센티는 말합니다. “에너지가 먼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러셀은 이 생각을 보다 일반적인 말로 표현했습니다. “내 프리우스는 컴퓨터 없이는 달릴 수 있지만, 엔진 없이는 달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기원은 수십억 년의 역사 뒤에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러셀의 연구는 그 수십억 년의 시간을 꿰뚫어 보게 해줍니다. “나는 ‘기원(origin)’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출현(emergence)’이라고 불러야 해요.” 만약 생명을 에너지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생명의 출현은 곧 최초의 에너지 흐름인 빅뱅까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러셀은 2013년 쓴 논문에서 빅뱅의 순간 우주는 ‘거의 무한대의 열역학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우주의 진화는 바로 그 압박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압박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 – 곧 질서를 무질서로 바꾸는 방법 – 은 바로, 욕조에서 회오리가 만들어진 것처럼, 비록 일시적이지만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러셀과 그의 공저자들은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우주의 모든 질서는 바로 이 역설에 의해 탄생한 것입니다.”
생명 역시 그렇게 탄생한 질서입니다. 빅뱅 이후, 원칙적으로는, 우주는 물질과 에너지를 점점 더 고르게 퍼지도록 팽창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생명을 포함한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쩌면 공간의 양자 요동이 물질과 에너지의 균형을 깨뜨려 지금의 우주와 질서를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입자는 서로 뭉쳤고 작은 중력의 차이는 다른 입자를 당겼습니다. 곧 중력에 의해 뭉친 물질과 상대적으로 광활한 빈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물질들은 붕괴하며 별이 되었습니다. 별을 둘러싼 기체와 먼지들은 다시 뭉쳐 뜨거운 핵과 화산 활동 및 끝없이 움직이는 지각을 가진 행성이 되었습니다. 이 불균형의 순간에 열수의 흐름은 열수 틈 구조, 곧 러셀의 화학정원을 만드는 ‘사문석화과정(serpentinisation)’을 일으켰습니다. 적어도 한 행성에서 그 행성의 지질학적 불균형은 화학적 불균형으로 바뀌었고 복잡한 원시 대사 체계가 등장해 최초의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생명의 기원은 특별한 어떤 시작점이 아니라 그저 빅뱅에서 출발한 일련의 사건들 중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생명을 이런 에너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생명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생명은 무엇을 하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몸의 원자를 평균적으로 수년마다 모두 갈아치웁니다. 곧 생명은 어떤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파괴와 창조의 과정입니다. 생명을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이렇게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곧, ‘물질과 에너지가 특정한 조건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매우 정교하게 조직화된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러셀의 이 생각은 우리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유아기에 나타난 불청객이자 하나의 에너지 흐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며, 따라서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 만들어줍니다. 우리 모두는 태초의 순간으로부터 에너지를 통해 연결된 자손들입니다. 다윈은 이런 생물학과 물리학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직관을 가졌고 이를 ‘생명의 원칙은 언젠가는 어떤 일반적인 법칙의 일부, 혹은 필연적 결론임이 밝혀질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덧붙였을지 모릅니다. 생명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냐고 말이지요.
(A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