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사태 10년 후의 방리유
2015년 10월 29일  |  By:   |  세계  |  1 comment

프랑스 사회와 도시 교외 지역(방리유)을 뒤흔든 소요사태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2005년 10월 27일, 클리시-수-부와(Clichy-sous-Bois)에서 10대 소년 두 명(지예드 베나와 부나 트라오레)이 경찰에 쫓기던 중 변전소로 숨어들었다 숨진 이후 소요사태는 3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방리유 지역의 청소년들은 경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학교, 체육관, 가옥, 불길에 휩싸인 자동차 등 이들의 충돌은 상당한 물질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면적인 봉기에 정치권이 크게 놀랐으며 국가는 불안정해졌습니다. 이는 알제리 전쟁 이후 전례가 없었던 질서 유지를 위한 공권력의 동원과 국가적인 긴급 사태를 유발하였습니다. 이 사태가 지속되는 동안 총 4,000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600명 정도가 구속되었습니다.

2005년의 봉기는 당시 프랑스 방리유가 겪어야 했던 사회적인 공황을 드러냈습니다. 10년 후, 이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눈부신 도심 재개발

최근 10년 동안 주요 방리유 구역들은 눈부신 변화를 거쳤습니다. 600여 개 구역의 재개발을 위해 10년 동안 약 480억 유로가 투입되었습니다. 약 151,000채의 가옥이 철거되었으며 136,000채가 재건축되었습니다. 소규모 신축 건물들, 잘 정돈된 공공 광장, 도로와 대중교통 등 이 구역들의 도심 경관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공황에 대처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 달리 이 구역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 대상 지역 거주민들의 소득은 전체의 56%에 머물고 있으며 실업 관련 수치도 여전히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15~64세 실업률은 다른 지역에 비해 10% 정도 높으며, 청년들의 실업률의 경우 다른 구역에서는 23%인데 비해 이 지역에서는 45%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역 거주민의 72%가 도시 개발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구역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공동화된 지역 경제는 각종 불법 판매 등 생존을 위한 경제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마약의 유통이 지속적으로 지역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변모하였고 현대화되었습니다. “대마초 시장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몇몇 코카인 망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주민과 그들의 일상에 대한 압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파리8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미셸 코코레프(Michel Kokoreff)는 강조하였습니다.

사회적인 삶의 위축

소요사태의 충격 아래서 이 지역에서의 사회적인 삶 역시 위축되었습니다. 지역 공동체에는 국가에 의해 부여된 재정적인 충격이 뒤따랐습니다. 인가되기 위한 새로운 요구 조건과 함께 프로젝트를 가져오기 위한 경쟁, 수익성의 요구 등으로 전체 지역 네트워크망이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규모가 큰 사업자를 선호하였고, 수백 가지의 사업 시도는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되어 매번 일자리가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더욱 구조화된 이슬람

이러한 맥락 하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디디에 라뻬로니(Didier Lapeyronnie)는 “위기, 그리고 문이 닫혀 있다는 느낌과 함께 종교는 문화적인 원천으로 변모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슬람은 다양한 구역들을 포함하는 종교적 장소 주변의 집단들과 함께 점점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종교적 가르침의 무게를 과대평가하지 말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사회학자 에띠엔 뺑고(Etienne Pingaud)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각종 지역 단체들에 할당되었던 사회적인 존재감을 채워가며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몇몇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를 향한 움직임은 프랑스 영토 내에 시리아 전쟁을 들여오거나, 지하드의 위협 등의 가능성으로 당국의 걱정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의심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순간, 이슬람의 위험성에 대한 집중을 유발하게 되어 무슬림들은 도리어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소외감은 여전히 남아

“지난 10년 동안, 거주민의 존엄성은 전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아제민 타이비(AzzedineTaïbi)가 요약합니다. 존엄성은 방리유 거주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로 방리유에서 선출된 이들에게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던 구호였습니다. 다른 곳보다 낙후된 공공 서비스를 통하여 거주민들은 자신들이 잊혀졌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입학이 늦은 아이들이 2배 정도 많은 방리유 초등학교의 문제가 상징적입니다. 교원의 수급 중지에 대한 센-생드니(Seine-Saint-Denis)의 결집, 혹은 학교 내에서의 사회적 혼성의 부족(일부 학교에 특정 지역 출신의 학생들만 수용)에 대한 몽펠리에의 쁘띠-바르(Petit-Bard) 구역의 어머니들의 결집 등은 공립학교의 근간에 자리한 인식의 치우침을 다시금 보여주었습니다.

경찰과 거주민의 반목

경찰과 거주민 사이의 관계 역시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2005년의 소요 이래로 경찰력은 강화되었습니다. CNRS 연구원 파비앙 조바르(Fabien Jobard)는 이를 보여줍니다: 경찰 조직의 위계는 사건들이 진행되는 동안의 질서의 유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인식은 이후 벌어진 일들에도 불구하고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잘 조직된, 위계화된 단위를 유지하여 무질서의 현장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유지할 뿐, 지역과 거주민을 잘 아는 가까운 곳의 경찰과는 한참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경찰력에 대한 불신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거주민과 경찰 사이의 반목은 뿌리 깊습니다. 특히 지역 청소년들의 거의 2/3 정도가 인종주의적이고 폭압적이라며 경찰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방리유에 대한 경찰의 개입이 그 자체로 방리유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고 사회학자 토마 키르즈봄(Thomas Kirszbaum)은 강조합니다. (르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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