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예제 이야기를 불편하게 여기는 학생들에게 미국사 가르치기
대학에서 미국사를 가르치는 나는 매 학기 강의 평가에서 “뱁티스트 교수는 노예제 문제에 집착한다”는 학생들의 불평을 접하곤 합니다. 그때마다 나는 미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역사의 특정 부분에 눈을 감으려 애써왔는지를 상기하곤 합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에 넣으려던 노예제에 대한 비판을 대륙회의가 삭제한 지 200여 년이 흘렀지만, 대학 신입생들은 여전히 노예제가 오늘날의 미국과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1990년대, 내가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강의할 때는 백인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던 시기였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아이큐가 낮다고 주장한 이른바 “벨 곡선(Bell Curve)”을 놓고 지성인들이 공개적으로 토론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노예제를 옹호하던 논리를 그대로 계승한 이런 식의 담론이 나의 미국사 강의실로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수업 중에 두 백인 학생이 오늘날의 기준을 적용해 과거의 노예주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흑인 노예들이 실제로는 행복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강의실의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던 T를 계속해서 흘깃흘깃 쳐다보았죠. T에게 발언 기회를 주면, 그가 두 학생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제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는 금방 판명됐습니다. T에게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죠?”라는 말을 던지자마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습니다. 그는 “특정 집단에게 노예제를 설명하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답한 후, 학기가 끝날 때까지 수업 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학생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늘의 현실(예를 들면 흑인 학생이 한 명밖에 없는 대학 강의실)을 만든 우리의 뿌리를 외면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1998년 마이애미의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었을 때는 미국의 변화한 인구구조를 강의실에서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앵글로계 백인은 이미 대학 내에서 소수가 되었죠. 당시 나는 노예해방 이전의 미국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몇몇 백인 학생들은 매주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가 너무 부담스럽고 강의가 노예제라는 주제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고 있다고 매시간 불평을 했습니다. 이들에게 일침을 놓은 사람은 자메이카 이민자 출신의 여학생 S였습니다. 수강생 중 단연 돋보이는 작문 실력을 지닌 S는 어느 날 작정한 듯 백인 학생들에게 “투덜대지 말고 공부나 해라, 이 수업은 원래 그러려고 듣는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강의실 내의 역학은 달라졌고, 수업 분위기는 확연히 바뀌었습니다. 불평하던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했고,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통찰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애초에 인종 문제를 야기한 역사적 권력 구도를 그대로 두고는 인종 문제를 넘어서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재직 중인 코넬대학은 백인 학생의 비율이 훨씬 높은 곳입니다. 노예제라는 주제에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는 분위기는 확실히 90년대보다 덜 합니다. 하지만 에둘러 불만을 표하는 학생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한 백인 여학생의 경우, 한 학기 내내 수업 시간에 한 말이라고는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의 노예상들에게 다른 아프리카인들을 팔아넘긴 게 아니냐는 냉소적인 질문뿐이었죠.
이번 학기에도 나는 강의실에서 불편함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그 과거가 오늘날 누군가가 겪고 있는 고통, 그리고 누군가가 누리고 있는 특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작업이라 해도,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