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시리아 난민이 와도 괜찮겠니?”
벌써 2주째, 파힘(57)과 그의 딸 라나(13)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인근 브루마트(Brumath)에 있는 티에리와 아니타 쉴러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파힘은 1층에 있는 그의 방에서 인터넷의 도움으로 아랍어 단어들을 프랑스어로 하나씩 옮기고, 라나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유튜브 동영상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리사(19)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구체적인 언급도 전혀 없이 갑자기 던졌던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집에 시리아 난민이 와도 괜찮겠니?”
소녀들은 금방 친해졌습니다. 말도 굉장히 많이 하는데, 거의 영어로 소통합니다. 친구들과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면 마리사는 라나를 데리고 나갑니다. 라나는 마리사가 친구들과 준비하던 중세-환상 영화 촬영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마리사는 시리아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난민들이 그들의 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나는 여기서 참 행복하다며, 이곳이 바다에서 40km 정도 떨어져 있는 시리아 북부의 자신의 마을하고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라나는 그 마을을 2012년 말에 떠났습니다.
“옆 마을에서는 400여 명이 살해당하고 여자들은 납치되었고, 아이들은 학살당했어요”
라나의 아버지는 설명합니다. 그 역시 브루마트에서 잘 지내고 있지만, 시리아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리아에서 10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혁명 당시 그는 “평등과 정의와 자유”를 위해 매번 평화적으로 시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이를 위한 차별 없는 평등”을 원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가 일하던 도서관이 폐쇄되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위험이 닥칠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리아를 떠났습니다.
그는 취업 허가를 받지 못했던 아부다비를 거쳐, 암스테르담을 경유하여 프랑스로 향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공제 연합인 FEP(la Fédération de l’Entraide Protestante)와 접촉합니다. 이 연합은 2014년 9월부터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에 머물 곳을 제공하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8월 17일, 파힘 일행은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였고 일주일 후, 그들은 이미 브루마트에 있었습니다. 쉴러 가족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프랑스가 전쟁에 휘말렸다면, 저희 역시 누군가가 저희를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아이들 중 셋이 이미 집을 나가 살고 있는 상황에서 공간이 모자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쉴러 가족도 “미지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고 말합니다. 쉴러 가족 역시 4년 동안 서아프리카 차드에 있었습니다. 티에리가 그 곳 병원에 자원하여 근무했습니다.
“저희는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죠.”
가족의 역사 또한 그들이 새로운 이들을 맞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39년, 전쟁 당시 그의 부모는 알자스를 버려야 했습니다. 나치 점령에서 벗어나 있는 남프랑스 도르도뉴로 가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도르도뉴의 사람들은 그들을 잘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들의 차례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한다면 효과는 클 거라고 생각해요.”
목요일 저녁, 파힘은 빨간 앞치마를 입고 그가 준비한 콩 수프를 내옵니다. 머물 곳을 찾던 이들은 아직 취업 허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만, 계속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정원 손질, 각종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FEP 매니저인 아드리앙 세칼리가 손님으로 와서 아랍어-프랑스어 통역을 도맡았지만, 평소에는 라나가 파힘의 아랍어를 영어로 옮깁니다. 라나는 브루마트에 온 1주일만에 지역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파힘은 이에 대단히 안도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내일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질서가 바로잡힌다면 저는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어요. 저는 그곳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이죠.”
그는 동시에 프랑스 당국에서 그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문합니다. 당분간은 쉴러 가족의 집에서 언제까지 머무르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불확실성에 내몰려있잖아요”라고 대답하는 티에리 쉴러는 이 사실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편 아니타는 어째서 당국이 이들에게 취업 허가를 내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녁 식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입니다. 이 때 행정적인 문제나 낮 동안 새로 배운 단어들을 사용해보기도 합니다. 파힘의 프랑스어 뿐 아니라 티에리의 아랍어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누벨 옵세르바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