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크라우스 칼럼] 법 위에 군림하려는 종교는 시민사회의 적 (2)
2015년 9월 11일  |  By:   |  칼럼  |  10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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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질수록, 이 세상에 미리 정해진 섭리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졌습니다. 과학자들에게 신성한 진리라는 건 없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연스레 종교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자들에겐 과학적 발견과 그를 통해 알아낸 자연의 원리에 대해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과학자들이 종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오늘날의 발견이 이미 존재하던 종교적 교리에 부합한다는 식으로 곡해하거나, 교리에 명백히 배치되는 과학적 발견은 아예 외면하기도 합니다.

과학자들은 다른 종류의 믿음이나 통념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합니다. 천문학자들이 점성술사들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제법 많은 대중들이 점성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가며 한낱 미신에 불과한 점성술을 깔아뭉갤 수 있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백신 접종을 거부하며 자식을 위험에 빠뜨린 부모들을 보고도 의사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억지 그만 부리라고 말이죠. 그런데 거대 종교 앞에만 서면 똑같이 과학으로 반증할 수 있는 엉터리 주장인데도 태도가 달라지곤 합니다. 과학자가 너무 오만해서는 대중들이 과학에서 멀어질 거라며 일단 저들의 의견도 귀담아 듣자고 합니다. 이는 쓸데 없는 겸손이거나 대단한 위선입니다.

과학자가 말을 아끼면 어떤 후과를 감당해야 하는지 잘 드러난 사례가 “가족계획 협회(Planned Parenthood)”를 둘러싼 논란일 것입니다. 현재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은 가족 계획에 대해 연방 정부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을 삭감하지 않으면 예산안 처리를 막아 정부의 모든 기능을 마비시키겠다(government shutdown)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이 가족계획 협회에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협회는 필요한 경우 임신 중절 수술을 인정하고 태아의 조직 표본을 연구 목적으로 과학자들에게 지급합니다. 과학자들은 조직 표본을 갖고 알츠하이머부터 각종 암까지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법을 개발합니다. 태아 조직을 보관, 관리하는 비용은 과학자들이 부담합니다. 가족계획 협회의 해산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종교적인 이유로 낙태, 임신 중절에 반대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과학을 폄하하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저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지나친 표현을 자제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무언가를 신성하다고 여기는 개인의 믿음과는 무관하게, 폐기될 태아 조직을 갖고 질병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게 나을까요?

종교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혹은 쏟아지는 비판을 피하려고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을 자꾸 피하다 보면 결국 그 사회에서는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금기시됩니다. 그래서 저는 과학자들이 당당히, 더 크게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주장을 펼치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껏 그래 왔습니다. 제 글을 보고, 제 강연을 듣고 집에 가서 가족이 오랫동안 믿어온 종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가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가 소속돼 있던 공동체에서 쫓겨날 뻔 했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의문을 억누르는 건 모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줘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 특히 신성한 진리라고 믿는 것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검증하려 드는 것은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는 늘상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과학과 연구에 적용되는 윤리적 원칙과 시민사회의 삶에 적용되는 원칙이 어떻게 같을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전공인 우주론(cosmology)을 연구하는 일과 킴 데이비스가 동성 커플에게 혼인 증명서 발급을 거부하는 데 적용된 원칙은 달라도 한참 다를 거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사례에서 적용해야 하는 원칙과 가치는 똑같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 사실은 그 자체로 과학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립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신념 혹은 그에 따른 행동이 그 자체로 예외를 인정받으려 든다는 건 현대 민주주의 시민사회의 근간인 세속주의를 뒤흔드는 일입니다.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자유롭게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꺼내어 물을 권리입니다.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신성한 교리, 신성한 가치를 지킨다는 명목 아래 자유로운 질문을 막아서려 한다면, 이는 지난 500년 넘도록 과학과 함께 이룩한 인류의 진보의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류를 무지로부터 해방시켜준 과학의 역사를 우리는 자랑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이런 상식적인 행위에 “호전적인 무신론자”라는 꼬리표를 붙인다면, 과학자들은 망설임 없이 그 꼬리표를 달고 종교의 해악에 맞서야 합니다.

(New 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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