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다니엘 카네만 인터뷰(1/2)
다니엘 카네만은 겸손함 그 자체인 사람입니다.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80대의 그는, 온화한 표정과 태도로 조심스런 관찰자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는 런던의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비록 그의 프랑스어와 이스라엘어 억양 때문에 모든 단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인내를 가지고 정확히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스티븐 핑커는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생존 심리학자”라고 평했습니다. 1996년 세상을 떠난 그의 동료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그는 우리가 보모를 신뢰할 수 있는지에서부터 주식을 언제 사고 팔아야 할지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 가진 편향을 연구했습니다. 2002년 그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연구가 얼마나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개론이라 할만한 책인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을 2011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전미 과학도서상을 수상했고 동료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생각 시스템에 대한 책입니다. 하나는 자동적이고 본능적이며, 이 때문에 본질적인 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의식적이고 보다 깊은 생각입니다. 그가 다룬 주제가 너무 복잡했던 탓에 이 책에는 다소 이해가 어려운 설명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전 세계에서 수백만 권이 팔렸습니다. “블랙 스완”의 저자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이 책을 두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같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연구들은 기존의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믿음을 깨뜨렸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인간이 가진 의사결정 방식의 본질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과신(overconfidence)입니다. 이는 낙관주의의 하나로, 정부는 이 때문에 자신들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며, 또 여러 통계가 특정 정책이 예산을 초과하리라는 것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를 주어진 예산 내에서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마법 지팡이가 있어 인간이 가진 편향 중 하나를 없앨 수 있다면 바로 이 ‘과신’을 없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 편향은 마음 속 너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따라서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수많은 것들을 동시에 바꿔야만 합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기존의 알고 있는 사실로부터 어떤 전형적인 결론을 예측할 때에도 같은 편향을 보입니다. 탐이라는 청년이 깨끗하고 잘 정돈된 시스템을 좋아하며 과학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그가 인문학 보다는 전산학을 공부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수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탐이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스테레오타입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나는 테이블이나 의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죠. 이제 당신은 사회적 그룹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죠.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이 카네만이 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스테레오타입으로 판단하는 경향은 카네만 자신의 삶에도 극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에서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침공 전까지는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로레알 계열의 한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체포되어 드랜시의 난민캠프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일곱살 때였죠. 창가에는 수많은 남녀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경찰이 있었고, 그가 우리에게 그들이 굶주리고 있고 야채 껍질을 먹고 있다고 말하던 장면이 기억이 나는군요.” 다행히 그의 아버지는 동료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에 6주 뒤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역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파리 근교의 네일리(Neuilly)에 살던 우리는 장을 보러 갔습니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 그는 최대한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습니다. 그의 몸무게는 45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죠. 그저 뼈와 피부가죽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 순간의 엄숙함이 기억이 납니다.”
이들은 독일군을 피해 꼬뜨 다쥐르의 후안 레 핀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뒤 독일이 프랑스 남부로 내려오면서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카네만은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신이 매우 바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하루에 하나씩만 바랄 생각이었죠. 우리는 마치 사냥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토끼같은 자세로 살아야했죠.” 이 마을 저 마을을 오가며 중부 프랑스로 이동하던 그들은 한 양계장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기 단 6주 전, 당뇨가 있던 그의 아버지는 심장 발작을 겪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은 정말 정말 추운 날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베일을 쓰고 도끼로 나무를 베며 슬피 울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유대인들이 겪었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나는 정말 극심한 배고픔이나 끔찍한 폭력을 겪지는 않았어요. 회복의 여지가 많이 있었죠.”
(가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