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OS 블로그] 사망 시각
2015년 7월 31일  |  By:   |  Uncategorized  |  No Comment

나는 진정 그녀가 죽었기를 바랐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개인적이지 않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나는 그녀의 살아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4일에 한 번씩, 나와 내 팀은 병원에서 대기합니다. 16시간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은 처음 보는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아프지만 안정된 상태의 환자들(다른 의료팀이 보냈거나 새로 입원한 이들), 아프면서 아직 불안정한 상태의 환자들(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이들), 죽어가는 환자들(심폐소생술이나 긴급 삽관술이 필요한 이들), 그리고 이미 죽은 이들(사망 선고가 필요한 이들)이 우리를 부릅니다.

나는 암 병동에서 근무합니다. 이는 내가 받는 호출의 상당수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이들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날 첫 호출도 그랬습니다.

“사망 선고를 내려주셔야겠어요.” 호출번호로 연락을 하자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이론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병원 경험은 아직 부족한 2주 차 인턴에게 정해진 행동수칙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건 “x라는 상황에서는 y로 행동하시오”와 비슷합니다. 즉, 모든 결정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며 너는 그저 정해진 대로 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니까요.

그리고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은 그런 일 중에서도 가장 행동 수칙이 확실한 일입니다. 호출을 받으면, 먼저 환자가 있는 병실로 갑니다. 가족이 있다면, 그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환자가 정말 죽었는지를 봅니다. 펜라이트로 환자의 눈을 비춘 후 동공이 풀어졌고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호흡과 심박이 들리는지를 봅니다. 손가락을 경동맥에 대고 맥을 확인합니다. 시계를 봅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그 시각에 환자가 죽었음을 선고합니다. 다시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그들에게 부검을 원하는지를 묻습니다. (모든 사망 환자의 가족이나 보호자에게 이 질문을 하게 되어있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병실을 나와서, 그 일을 기록에 남깁니다.


언젠가 동료 인턴과 함께, 사망선고를 해야 한다면 가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을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가족이 없을 때가 나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의 장례식에 청진기를 든 기술자가 되어 기계적인 애도를 표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족이 없을 때 사망선고를 내려본 적이 몇 번 있었고 그의 이야기는 내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아주 고약해.”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 방에는 너랑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그건 아마 일방적 의사소통의 극단적 형태에서 느끼는 어색함일 겁니다. 그는 가능한 한 간호사를 그 방에 데려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어젯밤까지는 가족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내가 다가가자 간호사는 말했습니다.

간단한 환자의 병력을 들은 후 나는 그 방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을 완화하려 했던 이들의 노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방은 어두웠고 조용하다 못해 배경의 폭포 소리만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바깥의 형광등 불빛과 모니터 소음, 간호사들의 잡담을 피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문을 닫자, 나는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 또한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친구의 말은 옳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를 탓했고,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공포영화를 탓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 도망치려는 욕구를 만드는 내 뇌 속의 파충류 뇌를 비난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만드는 내 뇌를 탓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녀의 경동맥을 잡을 때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 앉는다면 얼마나 무서울지를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정말 죽었기를 바랐던 겁니다.

이미 시간은 2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성의 사망시각은 나의 바보 같은 두려움 때문에 미뤄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간호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마침내 의무감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기분이 들었고 나는 정해진 행동수칙을 마쳤습니다.

그 방을 나와, 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는 “사망(dead)”이라는 단어를 확실히 썼습니다. (이 단어를 반드시 써야 합니다.) 나는 환자의 보험회사에 연락했고, 사망 증명서를 썼습니다.

나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들이 전화 너머 흐느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들이 병실에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기계적인 애도를 표하는 청진기를 든 기술자였습니다.


레지던트 핸드북에 기록된 행동수칙이 매우 자세하다는 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 분명함이야말로 새로 인턴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 판단의 의미 역시 배제하지는 못합니다. 행동수칙의 단계 너머에는 그 가족들의 고통과 두려움이, 그리고 영원히 내가 알지 못할 타인이 존재합니다.

만약 x라면 y를 하라는 말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절대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 첫 사망 선고 환자님, 당신의 사망시각은 5분 빨랐습니다. 선고가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건 행동 수칙에 없는 일이었어요.

(PLOS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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