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볼] 물건을 고쳐쓴다는 것(2/2)
2015년 7월 7일  |  By:   |  문화  |  1 comment

1부 보기

이런 최신 유행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 물건을 고쳐 쓴다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수리에도 미학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거장의 유화가 낡아서 떨어지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복원해야 할까요? 떨어진 마른 물감 조각을 다시 그 자리에 붙이는 것이 최선일까요? 라파엘로의 그림에 폴리우레탄 본드를 발라도 괜찮은 것일까요? 르네상스 작품의 색이 바래기 시작할 때, 과연 화가의 원래 의도를 예상해 다시 색을 복원해야 할까요? 아니면 와비사비 정신을 따라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미술 보존주의자 중에 지난해 한 노파가 19세기 프레스코화인 “사라고사의 예수(Jesus in Zaragoza)”를 장난 같은 솜씨로 ‘수선’한 것을 지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그 노파의 그림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이 질문들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미학적 고려와 정통성(authenticity)이라는 생각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스코화가 다 떨어져 절반만 벽에 남게 된다면 누가 그 벽을 쳐다보려 할까요? 빅토리아 시대의 보존주의자들은 더 과감했습니다. 그들은 종종 거장의 그림에 덧칠하곤 했습니다. 티티아나의 색체에 그럴듯한 흐린 갈색 니스를 칠할 수 있었을 때는 당연히 그럴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보존주의자들은 갈라진 틈새에만 물감을 채울지언정 그림 위에는 좀처럼 덧칠을 하지 않습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코시모 투라의 ‘알레고리칼 피겨(Allegorical Figure, c.1455)’가 1980년대에 이런 식으로 수리되었습니다. 손상이 심한 그림에 대해서는 손상을 그대로 남겨두되 더 이상 이 손상이 커지지 않도록 처리하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소비중심사회에서는 이런 특별한 예들을 제외한다면 무언가를 고쳐 쓰는 행동은 가난과 검약의 부끄러운 신호로 여겨지며, 따라서 편견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한때 모든 사람이 옷을 수선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영국 귀족들은 사냥용 엽총 때문에 닳는 부분을 방지하기 위해 팔꿈치에 천을 댔습니다. 모든 것이 수선되었고, 여기에는 일종의 타협이 있었습니다.

어떤 타협일까요? 기술이나 손재주를 가진 이들이 사회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행동보다 생각을 높게 평가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서구와 비서구의 차이가 생깁니다.) 19세기에도 ‘순수한’ 이론가들은 ‘응용’ 과학자(또는 기술자)보다 더 대접받았습니다. 또한, 수리공보다는 전문직 기술자가 힘이 셌습니다. 기술자는 창조자이자 혁신가로 기름 묻은 헝겊과 공구를 들지 않았습니다. 기술역사가 데이비드 에드거튼은 이렇게 썼습니다. “물건들은 언제나 우리 삶의 중심이었지만 유지, 보수와 수리는 우리가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점점 더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에드거튼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물건을 수리하는 일은 – 특히 자동차와 같이 비싼 물건에 대해서는 –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카센터와 꾸준히 관계를 유지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작동이 멈춘 물건을 수리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물건을 고치는 일만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었죠. 수리 산업이 다시 제조업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초기 일본의 자전거 산업은 영국제 자전거의 예비 부품들을 모아 조립하는 일이었습니다.

물건을 고치는 일에 신중함이 뒤따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한 번 부서진 부분은 다시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를 무시하게 된 것은 수리의 미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탓도 있습니다. 새 제품에 대한 환상과 완벽한 외관에 대한 고집은 이제 우리 신체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주름살과 상처를 없애기 위한 성형수술이 – 비록 실제로 수술을 받는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더라도 – 권장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수리가 어려워진 현대 기술 역시 수리의 문화가 사라진 이유입니다. 오늘날 제품들은 물리적으로도 – 밀봉된 맥북의 충전기를 봅시다 –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 뜯는다 하더라도 어디를 고쳐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죠 – 스스로 수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무리하게 제품을 뜯었다가는 회사가 AS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건보다 서비스에 비용을 물리는 문화 – 프린터를 싸게 팔고 잉크에서 이익을 남기며, 스마트폰을 싸게 공급하고 통신요금을 비싸게 받는 등 – 역시 수리의 이점을 없앴습니다. 한때 놀라움이 가득한 공간이었던 물건들을 어지럽게 분해해놓은 뒷마당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수리 역시 비실용적이고 낡은 문화가 되었습니다. 나는 몇 년 전 프린터 수리공이 새 제품을 사는 만큼의 비용을 내게 청구한 뒤로 더 이상 컴퓨터 주변기기를 수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분위기가 다시 바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절약이 유행하거나 소비사회와 쓰레기에 반대하는 환경주의의 영향으로 말이지요. 런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마틴 콘린은 텔레비전의 요리 프로그램들이 물건들을 수리하는 방법을 포함한 DIY 쇼들로 바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물건을 만들고 고치는 해커 문화가 집단지성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Ifixit.com”은 컴퓨터, 카메라, 자동차, 가전기기의 수리 방법을 무료로 알려주며 각종 질문에 답해줍니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다니엘 차니와 수그루의 공동 창업자 제임스 케리건은 영상으로 물건을 고치는 법을 보여주는 사이트 “fixperts.org”를 만들었습니다.

공구와 재료, 수리법에 대한 조언을 전화로 받을 수 있는 리페어 카페(Repair Café)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3D 프린터로 필요한 부품을 즉석에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물건을 고치는 일이 멋진 행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면, ‘무심’과 ‘아소비’에 바탕을 둔 수리의 미학도 다시 주목받게 될 것입니다.

(AEON)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