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정학적 질서 재편과 함께 제동이 걸린 신자유주의 세계화 (2)
2015년 4월 29일  |  By:   |  세계  |  1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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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측면에서 흔히 “역사의 종언 이론(The end of history thesis)”은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결국 자본주의와 양립하는 민주주의가 지구적으로 모든 공동체가 조화롭게 잘 살 수 있는 가장 설득력있는 정치경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1990년대부터 이미 냉전 이후 이 역사의 종언 시대가 마침내 도래했다던 학자들의 분석과 정치인들의 주장은 현실을 냉철히 돌아본 분석이 아니었다는 게 명확해졌습니다. 아직 그런 시대는 오지 않았으니까요.

주 러시아 미국 대사를 지냈던 맥폴(Michael A. McFaul)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갖는 함의가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합니다. “2008년 러시아 정부가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침범해 조지아와 분쟁이 일어났을 때 엑손 모빌(ExxonMobil)이 자신들의 사업에 미칠 영향을 얼마나 우려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마 크게 신경 안 썼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다국적기업들이 동 우크라이나와 수도 도네츠크에서 일어나는 소식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자신들의 사업에 미칠 손익을 분주히 따져보면서 말이죠.”

우크라이나 사태가 다국적기업들의 세계를 무대로 한 경영에 종지부를 찍을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크리미아 반도 합병 후 서방 세계가 러시아에 부과한 경제 제재 탓에 1조 원 넘는 손해를 본 엑손 모빌이지만, 여전히 러시아가 결국은 세계 경제 체제와 완전히 따로 놀지 않을 거라는 분석에 기반해 석유, 천연가스 채굴권을 확보하는 데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기업들은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사업에 미칠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자, 근본적으로 경영 방침을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기업, 국가, 경제권 사이에 연결 고리가 더욱 촘촘해지면서 규제를 관장하거나 이른바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국가 권력이 때에 따라 기업의 경영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희화화하는 내용을 영화로 제작했다가 북한 정부의 조직적 해킹에 곤욕을 치른 소니 픽쳐스의 사례도 있지만, 더욱 명확한 사례는 러시아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온 엑손 모빌, 지멘스, 제네럴 일레트릭스 같은 회사들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뒤이은 서구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 입은 피해입니다. 푸틴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세친(Igor Sechin)이 운영하는 러시아 석유회사 로즈네프트는 이번 경제 제재로 가장 막대한 피해를 본 러시아 기업들 가운데 하나인데, 로즈네프트의 지분 20%를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BP입니다. 대부분 서구 시장경제 국가들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들은 자신들의 세계화의 첨병, 혹은 더 부드럽게 말하면 외교 사절로 여기며 자국 정부들과 이해관계가 대개 일치한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러시아의 군사작전 뿐 아니라 자국 정부의 보복에 오히려 피해를 입은 꼴이 됐습니다.

매년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시장 경제에 입각한 세계화를 이끌어온 다국적기업 CEO, 정치권 인사들이 두루 모여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열립니다. 올해 초 포럼에서는 강대국간의 갈등 수위가 계속 높아지면서 기업들이 경영에 갈수록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안전하게 경영을 해나갈 수 있는 차, 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정학적 상황에 끝없이 영향받는 졸에 불과했다”는 자조적인 말도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 경제가 그 우월함 덕분에 세계화의 순풍을 타고 확산되었던 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국가들이 만들어놓은 지정학 질서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브릭스 국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착시에 빠졌던 겁니다. 그리고 그 지정학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화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자꾸 불거져나오는 겁니다. 세계의 공장과 세계의 시장을 자처하며 시장경제 질서에 빠르게 편입하는 듯했던 중국의 태도도 사실 애매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서방 국가들과 대놓고 갈등을 빚지는 않더라도 자국의 이익이 걸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역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를 굽히지 않아 왔으니까요. 결국 지금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탈냉전 시대에 들어 강화된 정치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자리잡힐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불확실성은 물론 불안정성도 높아졌습니다.

촘촘해진 기업, 국가, 경제권 사이의 연결 고리는 경제적인 불안정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4년 버냉키(Ben Bernanke)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지난 20년 동안 거시경제에 있어 예상치 못한 변수는 지속적으로 줄어왔다”며 우리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평온한 시기(Great Moderation)를 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 됐습니다. 서구의 선진국들은 2008년 경제 위기가 시작된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완전히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회복세에 접어든 나라들도 내부적으로 중산층이 얇아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전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급진적 정치세력이 점점 득세하고 있고, 미국의 양당제는 이념 양극화에 따른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는 문제가 시장경제 질서를 기반으로 한 세계화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세계화가 전혀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대에서나 나올 법했던 “과연 자본주의 체제가 옳은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지속될 수 있을까?” 같은 질문들이 다보스 포럼에 참석한 경제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면, 부적응자 혹은 패자의 투정 정도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불평등 문제는 교황부터 IMF 총재, 미국 대통령까지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평등은 결국 안정적인 경제질서를 해칠 수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더 지속될 과도기에서는 이런 우려와 근본적인 질문이 끊이지 않고 나올 겁니다.

“기업이 해야 할 일은 비즈니스다(The business of business is business)”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저 격언은 수많은 대기업 CEO들이 지금껏 금과옥조로 여겨온 말이기도 합니다. 기업들이 가장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목표는 주주들에게 가장 큰 이윤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마이클 젠슨(Michael Jensen)의 주장도 마찬가지죠. 기술 혁신부터 실리콘 밸리의 대성공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일은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공공 정책과 정치는 기업이 관여할 바가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기업이 정치에 아예 관심을 끊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업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규제 부분에 있어서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규제 당국에 로비를 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기업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해 왔죠. 다만 더 높은 차원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이슈들과 관련해서는 기업들이 ‘우리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라는 사고가 널리 퍼졌다는 겁니다. 세계화가 수반한 변화와 그에 대한 반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문제는 기업들이 더 이상 정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갈수록 대중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 지금, 이런 과도기일수록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겠지만, 성공하는 기업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고 기업 경영이 순전히 회계 장부의 이윤을 높이는 데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공동체에 다양한 혜택을 미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기업일 겁니다.

마가렛 대처는 “이 세상에 사회 같은 건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개개인이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죠. 대처가 총리로 부임하던 시절에는 통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제 공동체와 사회가 다시 중요해졌습니다. 기업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The Atl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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