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 젠더 카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힐러리 클린턴이 공인으로 살아온 시절 동안 이른바 ‘젠더 카드’는 그녀에게 불리하게만 작용해 왔습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전에 그녀의 도전을 그저 “백악관에 여주인 앉히기”로 폄하하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은 젠더 카드를 휘두를 것”이라는 비아냥도 들려옵니다.
저는 오히려 이번에야말로 클린턴이 보란듯이 젠더 카드를 제대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수 십 년 만에 페미니즘의 인기가 가장 높아진 이 역사적인 기회를 클린턴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이미 그녀는 할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부각하고, 여권 운동에 매진해 온 과거와 “뉴욕 주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과 같은 타이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클린턴은 오랜 세월 “남자 기죽이는 기센 여자”라는 비아냥을 사면서도, 동시에 여성으로서 성차별적인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그녀는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로 취임했을 때 결혼을 하고도 자기 성을 그대로 쓴다는 이유로 비난을 샀습니다. 반면 1992년에는 커리어를 이어가면서도 영부인 노릇을 잘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시달리던 끝에 “집에서 쿠키나 구우며 살 수도 있었지만, 내 일을 하기로 했다”고 대답해, 전업주부들을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200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그녀가 “나는 여성으로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이해할만 합니다. 감히 여자가 백악관 입성을 꿈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러나 지난 8년 간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고, 여성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죠. 이와는 별개로, 정계에서 남성 정치인들은 언제나 ‘젠더 카드’를 휘둘러왔습니다. “남자로서 이 자리에 섰다” 따위의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뿐, 남성성을 과시하는 것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사에서 흔하디 흔한 일이었습니다. 1988년 마이클 듀카키스가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가 부인이 강간 살해 당했어도 사형제도에 반대하겠느냐는 질문에 “남자답게” 폭발적인 분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판인데요. 작가 겸 영화감독인 잭슨 캣츠는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남성성을 과시하는 대회로서, 어떤 종류의 남자가 운전석에 앉을 수 있는가를 따지는 자리로 기능해왔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대선은 클린턴에게 ‘젠더 카드’를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껏 남성 후보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클린턴도 ‘젠더 카드’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2016년 대선은 더 이상 누가 더 큰 총을 다룰 줄 아는지, 누가 더 남자답게 카우보이 모자를 소화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선 주자들이 미국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상징은 그 미래상에 포함될 자격이 있습니다. (가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