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해방 150주년, 미국은 과연 달라졌을까요?
2015년 3월 17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지난 주에 있었던 노예 해방 150주년 기념일은 우리 가족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가문은 노예 소유주였기 때문입니다.

남북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865년 3월의 어느 날, 흑인 병사들로 이루어진 35연대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북부의 쌀 농장을 향해 진군해 왔습니다. 우리 가문 소유로, 250명의 흑인 노예들이 일하고 있는 농장이었죠. 연대를 이끄는 제임스 비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의 남동생이었습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나의 고조부이자 농장주였던 윌리엄 볼은 가족들과 함께 저택의 식당에 앉아 구약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집안 여자들은 신문 기사의 경고처럼 흑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할 것을 두려워해 옷을 두 겹씩 껴입고 있었습니다. 저택 뒷 편, 노예들이 살던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죠. 저택에 당도한 군인들은 노예들을 일터로 부를 때 사용하던 종을 뜯어내어 박살냈습니다. 윌리엄 볼은 저택의 문을 열어 백인이자 노예제 폐지주의자였던 제임스 비처를 맞이했습니다. 비처는 농장 사람을 모두 불러놓고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방된 사람들은 밤새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1865년 초, 미국 남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 많은 농장의 문이 열렸고 노예들이 풀려났습니다. 2차대전 막바지에 미군과 소련군이 유럽의 나치 수용소의 문을 열어제끼던 장면과 비교할만한 모습이었죠. 미국 남부 농장의 노예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자”였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고,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플랜테이션의 농장주와 노예들이 현재로 올 수 있다면, 오늘의 미국은 이들에게 그렇게나 낯선 곳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400만 흑인이 농촌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있는 대신 100만이 교도소에 갇혀있는 곳이 오늘의 미국이고, 문맹을 면한 흑인이 처벌을 받지는 않지만 티파티와 세금 내기를 거부하는 극단주의자들이 특정 지역의 공립 학교에 예산을 주지 말자고 캠페인을 벌이는 곳이 오늘의 미국이니까요. 농장에서 도망친 흑인을 잡으러 다니던 “노예 단속반”은 사라졌지만, 이를 대체한 것은 흑인을 집중적으로 겨냥하는 경찰의 불시검문입니다.

이달 초, 법무부는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경찰의 불시 검문과 괴롭힘, 구금을 당하는 시민 중 흑인의 비중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교통신호 위반과 불법 주차로 딱지를 뗀 사람의 90%, 체포당한 사람의 무려 95%가 흑인인 것으로 드러났죠. 법무부 장관은 흑인 인구가 많지만 시정을 이끄는 사람은 대부분 백인인 퍼거슨 시에서 이렇게 거둔 벌금과 보석금으로 시 정부의 재정을 메꾸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도시가 미국에 퍼거슨 뿐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경찰이 그 옛날의 노예 단속반과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장도 하지 않은 채 경찰의 손에 죽은 현대 미국의 흑인 청년들 – 7월에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죽은 에릭 가너, 8월에 퍼거슨에서 죽은 마이클 브라운, 같은 달 LA 에서 죽은 이젤 포드, 11월 클리브랜드에서 죽은 12살 타미르 라이스와 브루클린의 아카이 굴리, 12월 피닉스에서 죽은 루메인 브리스본, 지난주 매디슨에서 죽은 토니 로빈슨 – 을 살인을 해도 처벌받지 않았던 노예 단속반의 손에 죽어간 수 많은 흑인 노예들과 나란히 놓자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 비교는 분명 무리수일 겁니다. 그러나 최근 사건의 배경에는 노예제 시절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이 깔려있으며, 이것이 경찰에게는 무의식적인 발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노예제의 유산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N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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