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옮기는 이 (The Interpreter): 인류학, 심리학, 언어학, 그리고 연구자의 인생에 관하여 (2)
고고학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정에 따르면, 피라한 족은 한 무리의 호모 사피엔스가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이후, 약 일만 년에서 사천 년 전 아마존에 당도했다. 피라한 족은 한때 무라(Mura)라 불리우던 보다 큰 인디오 무리의 일부였으나, 브라질인들이 1714년 무라 족과 처음 마주칠 무렵엔 이미 떨어져 나와 독립한 상태였다. 무라 족은 포르투갈 어를 배웠고 브라질인들의 생활 습관을 익혔으며 그들의 언어는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피라한 족은 정글 속으로 더 깊이 피신했다. 1921년 인류학자 커트 니무엔다후는 피라한 족과 시간을 보낸 후 그들이 “문명사회의 이득에 거의 관심이 없으며” “문명화된 사람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해왔다는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S.I.L은 거의 오십 년 전 피라한 족과 첫번째 접촉을 가졌다. 선교사 부부인 아를로 하인리히와 비 하인리히가 마르멜로스의 거주지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하인리히 부부는 약 6년 반 가량을 머물렀으며 언어에 능숙해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정 단어를 구성하는 소리, 즉 음소를 발음하는 게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고, 콧바람 소리와 날카로운 들숨, 입술을 튀기거나 맞부딪치는 데서 오는 소리들이 두드러졌다. 개별 낱말들을 익히는 것도 어려웠는데, 피라한 족이 버릇처럼 한 단어를 한 음절로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언어 특유의 억양도 헷갈리기 쉬웠다. 단어의 뜻은 높낮이에 따라 달라졌다 (‘친구’와 ‘적’은 오직 한 음절의 높낮이만이 달랐다). 하인리히 부부의 경우 언어를 익히기 훨씬 어려웠는데, 다른 몇몇 아마존 부족의 언어처럼 피라한 어에도 남성형과 여성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사용하는 자음이 하나 적었다.
“문법의 첫단계를 편안하게 느끼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만도 애를 먹었습니다,”라고 하인리히 부부는 내게 말했다. 성경 이야기를 번역하기 2년 전이었다. 남편은 누가복음에서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골라 더듬거리는 번역으로 피라한 남자에게 읽어 주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그의 방식대로 “거 재밌군요”, 라고 답했습니다.” 하인리히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나 영적인 깨달음은 없었어요. 어떤 감정적 영향력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저 이야기일 뿐이었어요.” 거듭되는 말라리아의 발병에 시달리던 부부는 S.I.L을 통해 브라질리아의 행정직으로 옮겨갔으며, 1967년 스티브 쉘든과 그의 아내 린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족들과 지낼 무렵 쉘든은 언어학 석사학위를 땄으며 피라한어가 예상 가능한 패턴에 들어맞지 않는 바람에 좌절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S.I.L 컨설턴트와 함께한 워크샵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 “여기서 저기, 다시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체계 같은 게 있는지조차 모르겠다고요.” 라고 말하곤 했어요. 흔히 돌아오는 대답은 “음, 아마도 있을 텐데, 조금만 더 잘 찾아봐요.”였어요. 보통의 언어에서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거든요.” 느린 진전에 대한 쉘든의 불안감은 격심한 것이어서, 많은 아침을 복통에 시달리며 깨어나곤 했다. 1977년, 피라한 족과 십 년을 보낸 후, 그는 S.I.L. 브라질 지부의 총책임자로 승진하여 에버렛에게 그의 자리를 대신해줄 것을 부탁했다.
에버렛과 그의 아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피라한 어로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까지는 여러 달이 걸렸다. “언어학적인 면에서 기존 언어와 공통점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언어를 배워야 하는 곳은 전 세계를 통틀어 거의 없어요,”라고 에버렛은 내게 말했다. “단일언어 현장 상황(monolingual field situation)이라고 불리죠.” 그는 S.I.L.에서 그의 선생이었던, 미시간 대학의 언어학과 학장이자 현장의 언어학자로서도 전설적이었던 고 케네스 L. 파이크로부터 훈련받았다. 파이크는 태그메믹스(tagmemics)라 불리는 언어분석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에버렛에게 일반명사부터 시작할 것을 가르쳤다. “‘막대기’라는 단어를 찾아낸다고 합시다.” 에버렛은 말했다. “그럼 ‘막대기 두 개’에 해당하는 표현을 찾아내고, 다시 ‘막대기 한 개가 바닥에 떨어진다’ ‘막대기 두 개가 바닥에 떨어진다’. 일일이 해 봐야 해요. 절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주어, 동사, 목적어가 어떻게 되는지 기본적인 감을 잡으려면.”
피라한 족을 방문한 초기에 그러한 과정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날 아침 벌레 퇴치제를 바르던 중, 나를 지켜보던 나이든 피라한 남자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에버렛에게 물었다. 몸짓언어로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한데 누른 다음 입으로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 대고 흔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이마에 댄 다음,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를 찰싹 후려쳤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버렛에게 말했다. “자기가 자기를 때린다.”
나는 다시 해보았다. 이번엔 좀더 규칙적으로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에버렛에게 말하길, “비행기가 그의 팔에 착륙했다.” 에버렛이 내가 한 행동을 설명했을 때, 남자는 가엾은 듯 경멸적인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버렛은 웃었다. “당신은 우리가 흔히 느끼는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 알려주려 한 거죠. 벌레가 귀찮게 한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해하지도 못할 겁니다. 벌레들은 삶의 일부에요.”
“알겠어요.” 나는 말했다. “그래도 벌레 흉내를 몰라본 건 놀라운데요.”
“그게 얼마나 문화적인 행동인지 생각해 봐요.” 에버렛은 말했다. “손의 움직임. 소리. 우리가 동물을 흉내내는 방식조차 문화적이에요.”
에버렛은 언어에 대한 피상적 이해 그 이상을 얻기 위하여,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여러 문화적 틈새를 메꿔야만 했다. “정글에 들어가 그들이 밭 가꾸는 걸 돕고 함께 낚시를 했죠.” 그는 말했다. “피라한족의 일원이 될 순 없어도, 언어를 느끼고 흡수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해요.” 피라한 족은 한두 세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집단적 기억도, 고유한 신화도 갖고 있지 않다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학의 인류학자 마르코 안토니오 곤살베스는 1980년대 피라한 족과 18개월을 보낸 뒤 부족의 믿음에 관한 학위논문을 썼다. 제한적이나마 피라한 어를 구사하는 곤살베스는 피라한 족에게 만들어진 신화가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신화를 지닌 아마존 부족 역시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에버렛이 말하길, 피라한 사람들과 숲,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냐고 캐물었을 때 부족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늘 언제나 지금 같았어요.”
에버렛은 또한, 피라한 어에는 색을 나타내는 고정된 낱말이 없으며 그때그때 바뀌는 묘사구를 대신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일 빨간 컵을 보여주면 아마 “이건 피처럼 보여요.”라고 할 겁니다.” “혹은, “이건 vrvcum 같군요.”라고 할 수도 있지요. 부족민들이 붉은 염료를 추출하는 열매의 이름입니다.”
첫해가 끝나갈 무렵, 댄 에버렛은 피라한 어에 대한 산지식을 갖게 되었다. 커렌은 집안일을 하는 동안 카세트 레코더를 허리에 감아놓고 오디오 테이프를 들어가며 공부했다. 에버렛 부부는 피라한 족의 오두막보다는 약간 더 정교하고 큰, 벽이 있고 잠글 수 있는 창고가 딸린 섶 오두막에서 지냈다.
아마존에서의 이듬해, 커렌과 에버렛의 큰딸인 샤논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었고 커렌은 의식불명상태에 빠졌다. 에버렛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강 장사치로부터 보트를 빌려 여러 날 동안 정글을 헤치며 여행했다. 그녀가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자마자 에버렛은 마을로 돌아왔다 (커렌은 그와 합류하기 전 여러 달 동안 벨렘에서 요양했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은 다른 이에게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의 일이라 믿습니다.” 에버렛은 말한다. “살해당하거나, 맞아 죽거나, 감옥에 갇히더라도 말이죠. 그건 신을 위한 일입니다.”
에버렛이 아마존에 도착하기 전, 그의 언어학적 훈련은 현장에서 활용하는 기술에 국한되어 있었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형식적인 언어이론을 습득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신약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정도의 기초적인 언어학 훈련을 원했어요.” 이 계획은 S.I.L.이 아마존에서 일하기 위해 브라질 정부와 맺었던 계약이 깨지면서 바뀌게 되었다. S.I.L.은 에버렛에게 상파울루 주의 캄피나스 주립대(UNICAMP, 유니캄프)에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멸종위기에 처한 언어를 기록하려는 언어학자라는 것을 보여줘야만, 브라질 정부 측에서 부족의 땅에서 계속 거주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78년 가을 유니캄프에서, 에버렛은 촘스키의 이론을 알게 되었다. “내게 그 이론은, 또다른 개종의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1950년대 후반, 아직 MIT의 소장학자이던 촘스키가 최초로 주목을 받을 무렵엔 행동주의가 사회과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B.F.스키너에 따르면, 아동들은 맞는 언어적 용법을 사용할 때 따라오는 칭찬을 통해 단어와 문법을 학습한다. 실험실 동물이 먹이를 얻기 위해 레버를 누르는 것과 같다. 1959년, 스키너의 책 <언어 행동(Verbal Behavior)>을 거의 박살내 놓은 리뷰에서 촘스키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문법적 문장을 만들어내는 아동들의 능력이야말로 말하기 습득이 모방이나 지시 혹은 보상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가 1975년 <언어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Language)>에서 기술했듯, “인간의 언어를 배우게 되는 일은, 이러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지 않은 존재에게 있어선 대단히 예외적인 지적 성취일 것이다.”
촘스키는, 출생시 인간의 뇌에 언어를 목적하는 특정한 역능(力能, faculty)이 자리를 잡는다고 가정했다. 그는 그것을, 겉보기엔 얼마나 다르든간에 모든 언어가 공유하고 있는, 시간에 불변하는 규칙의 모듬, 즉 보편문법을 탑재한 “언어 기관”으로서 묘사했다.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 기관이란 간이나 심장처럼 적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며 단지, 언어의 바탕에 깔린 추상적 구조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어의 성질, 구조, 구성과 활용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촘스키는 기술했다. “인간 지성이 보여주는 특정한 경향성에 대하여 약간의 이해나마 얻고자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초반, 전세계 대학의 촘스키주의자들은 언어의 형식분석과, 명사의 가지치기를 나타내는 한층 복잡한 트리 다이어그램으로 문장을 쪼개는 일과, 전치사구와, 또한 ‘X-바‘, ‘변형‘, ‘움직임‘, ‘심층구조‘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원칙을 구성하는 몇몇 요소들을 일컫는 용어들이었다) 에 몰두했다. “나는 상당히 낮은 수준의 노력을 요하는 언어학을 하고 있었던 거죠.” 에버렛은 말했다. “촘스키나, 촘스키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의 저작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그게 완전히 다른 수준의 이론이란 걸 알게 됩니다. 그거야말로 정말 과학적이라 할 만했어요.”
유니캄프에서 에버렛은, 피라한 어에 대한 엄밀한 촘스키주의적 분석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했다.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상파울루와 피라한 마을을 오가며 시간을 쓴 결과, 에버렛은 1983년에 그의 논문을 완성했다. 포르투갈어로 쓰여지고 이후 브라질에서 책으로 출간된 <피라한 어와 통사론(The Pirahã Language and the Theory of Syntax)>은 촘스키의 트리 다이어그램에 충실하게 입각한 매우 기술적인 논의였다. 그러나 그 논문을 집필하며, 에버렛은 피라한어가 촘스키의 패러다임에 들어맞지 않았던 여러 언어적 사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부분을 빠뜨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에버렛은 말했다. “그 공백을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학위논문은 에버렛에게 미 학술단체협의회의 지원금 뿐 아니라 미 국립과학재단의 연구보조금을 안겨주었고, 그는 1984년부터 85년까지 MIT의 방문학자로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에버렛은 촘스키 연구실 바로 옆방에 자리를 얻었다. 그는 곧 이 유명한 교수가 명석하지만 대단히 냉소적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에게 당신 이론을 펼칠 때, 그걸 듣는 상대가 묻지 말아줬으면 하는 질문들이 늘 있기 마련이죠.” 에버렛은 말했다. “촘스키가 제일 먼저 묻는 건 그런 질문들이었죠.”
1988년, 에버렛은 피츠버그 대학에 임용되었다. 그 즈음 촘스키의 규칙체계는 심지어 촘스키 자신조차 너무 방대하다고 느낄 정도의 복잡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모든 언어의 밑바탕에 자리한 원칙을 나타낼 수 있는, 보다 단순한 모형을 구현하려 하기 시작했다. 에버렛은 발전 과정의 곁을 충실히 지켰다. “촘스키는 작업 중인 모든 논문을 내게 보내주곤 했어요.” 그는 말했다. “촘스키의 수업에 출석해 자료를 모으고 오늘 이론의 진도는 정확히 어디까지였나 고민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순례‘를 나선다는 측면에서, 나는 여느 학자들과 다름이 없었어요.” 동시에 에버렛은, 피라한 어가 지닌 특이성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얘기한다. “무엇하나 촘스키의 언어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는 말했다. “촘스키의 이론은 오직 트리 구조로 얻을 수 있는 특질에 대해서만 설명을 허락하거든요.”
90년대 초반, 에버렛은 1939년에 사망한 프러시안 태생의 저명한 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의 것을 포함하여, 촘스키에 앞섰던 언어학자들의 저작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의 제자였던 사피어는 예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미국의 여러 인디언 부족의 언어를 연구했다. 사피어는 문화가 언어를 형성하는 방식에 매료되었고, 촘스키가 언어적 보편성에 천착할 것을 예상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각각의 언어를 유일한 언어로 만들어주는 변형적 특성(variation)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의 1921년작, <언어(Language)>에서, 사피어는 언어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기술로서 “모든 창조적 노력이 그러하듯 언어 역시 제각각이다. 의식적으로 생겨나는 건 아닐지라도, 그처럼 언어간에 드러나는 차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예와, 관습과, 믿음과, 종교가 보여 주는 것처럼 명확하다.” 반면 촘스키는, 언어 연구에서 문화는 거의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며, 오지로 떠나 멸종 직전의 언어가 내는 수수께끼같은 소음을 기록하는 일은 무의미한 작업이라 여겼다. 촘스키적 관점이 우위를 점했다. 에버렛은 이게 완전히 좋은 일이기만 한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쓰여진 사피어의 저작들로 되돌아갔을 때 깨달았어요. 잠깐, 이거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이잖아,” 에버렛은 말했다. “사람들은 촘스키의 형식주의로 언어를 해석하고 나서야 ‘진짜’로 그 언어를 이해했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그 언어를 독립된 언어답게 만드는지에 대해선 어떤 통찰도 줄 수 없으면서 말이죠.”
에버렛은 촘스키 형식주의의 첫번째 원칙에 질문을 던졌다. 문법원칙이 뇌에 미리 내장되어 있지 않다면 영아는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 자궁 속에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순간부터 아기들은 언어에 ‘적셔지고’, 부모 및 양육자는 많은 노력을 들여가며 어린이들에게 언어를 말하고 문장으로 정리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는 몇 년 넘게 걸리는 과정이다. 촘스키가 주장한 대로, 언어가 그저 “다른 신체 기관처럼 성장한다”는 게 사실일까? 에버렛은 언어를 전담하는 생물학적 기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필요한 신경적 기관이나 그 비슷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촘스키의 이론이 주장하는 것 그 이상으로 문화가 언어를 연구하는 데 종요로운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힘입어, 에버렛은 “문제에 접근하는 전반적인 방식을 완전히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